제주의 ‘토착적 모더니티’, 그 문명적 분투

고명철 2025. 6. 3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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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世通, 제주 읽기] (325) 김수열, 날혼, 삶창, 2025
사진=알라딘

1.
현대문학을 에워싼 통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문학 교육을 통해 문학 제도로서 견고히 자리한 이 통념은 현대문학 전반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가늠자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텍스트중심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문자로 표현된 문학의 미학적 속성을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 가치로 간주하여 해당 작품을 창작·향유·평가하는 데 자족한다. 여기에는 문학 본연이 지닌 매우 중요한 특질을 소홀히 하거나 둔감하거나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편견이 있다. 그래서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좋은 문학'은 텍스트중심주의로만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에게 문학은 문자로 표현된 작품으로 다가와 문자 미학이 갖는 속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문자 탄생 이전부터 인간이 입말을 바탕으로 노래와 춤이 절로 어우러져 전해내려오는 이른바 구전문학의 속성을 대수롭게 여겨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서구 근대문학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현대문학은 구전문학의 속성과 결별한 채 텍스트중심주의에 치우쳐 있는 딱한 현실에 놓여 있다.

따라서 김수열의 시집 '날혼'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 텍스트중심주의에 대한 김수열의 창조적 비판이 좁게는 한국문학 및 제주문학의 차원에서, 넓게는 세계문학 차원에서, '좋은 문학'을 향한 문명적 분투를 수행하고 있다.

2.
김수열의 다른 시집들도 그렇지만, 이번 '날혼'에서 한층 더욱 돋보이는 것은 제주어로 이뤄진 시편들이다. 시인의 출생과 삶이 제주와 한몸으로 육화된 시편들은 근대 국민국가의 공식어(official language)인 표준어로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제주의 역사문화와 생태문화가 함의한 문명적 가치를 제주(어)가 지닌 '구연적(口演的) 재현­상상력'의 신명으로 노래한다.

이젠 동무릎 몬 녹아부난 밭일 설러분 진 오래 되고 경허여도 바당밭은 어떵어떵 댕겨점신게 동네 젊은 해녀들이 고치 들엉 도와주난, 보행기 의지허영 갯것이 강 할망바당에 들민 맘은 편안허여 이디저디 아픈 것도 싹 잊어불고
― '할망바당' 부분

야, 그 물꾸럭, 어디로 가신고?/헤엄도 잘 치지 못 햄실 건디/담고망 잘 촛아봐, 먼 디 가진 못해실 건디……//허리춤 작은 망사리엔 조쿠쟁기 구살 몇 개/벌거벗은 우리는 손수 만든 족대 소살을 팽팽히 당기고/다리 어신 물꾸럭을 찾아 눈이 시벌게지도록 원담 돌구멍을 뒤졌다
― '물꾸럭' 부분

오도롱 주재소였다/얘야, 착하지? 산에서 있었던 일, 다 말해보라, 어른들이 뭘 했는지 아네? 뭐라 말했는지, 생각나네? 아는 거이, 생각나는 거이, 다 말해보라,/고럼, 사탕 주가서//
오도롱 폭낭 아래였던가/허이고, 착하지이? 산에서 배운 노래, 불러보라, 원수와 더불어, 알아? 날아가는 까마귀야, 생각나멘? 아는 냥, 생각나는 냥, 한번 불러보젠?/게믄, 사탕 주커메
― '네 살짜리가 뭘 안다고……' 전문

그동안 우리에게 낯익은 문학 교육의 통념으로 위 세 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혹자는 표준어로 씌어졌다면 위 시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표준어로 옮기면, 어느 정도 위 시들의 의미를 표면상 읽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 읽기는 말 그대로 표준어로 표현된 시를 눈으로 읽고 텍스트중심주의에 기반한 시 독법에 억지춘향격으로 미의식을 꿰맞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준어를 바탕으로 한 '문자적 재현­상상력'으로만 위 시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 시의 미감에도 둔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주어 안팎의 '구연적 재현­상상력'과 '문자적 재현­상상력'이 회통(會通)하는 가운데 생성하는 시의 감응력을 만끽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젊었을 한창 시절 "영도다리 지나 울릉도 독도 먼 물질 간다/원산 청진 멀리 두고 울라디(블라디보스톡-인용자) 바당 먼 물질 간다"('먼 물질')처럼 출가해녀(出嫁海女)로서 왕성한 생업활동을 한 해녀가 지금 육신의 건강이 노쇠한데도 불구하고 해안가 얕은 곳 '할망바당'을 다니며 해녀로서 자존감을 지닌 제주 해녀의 생태문화를 살아내고 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할망바당'). 물질을 시작하여 험난한 바다에 자신의 목숨을 의탁한 제주 해녀는 바다의 생리를 거역하지 않으면서 한평생 바다의 우주적 리듬을 타며 제주 해녀로서 자기존재와 제주 공동체와 운명을 함께 해왔듯이, 예전처럼 물질 생업활동에 전심전력을 쏟을 수 없지만 노쇠한 해녀는 그 육신이 허락하는 한 '할망바당'을 행복하게 들고 날 터이다. 

여기서, 제주 바다의 생리와 우주적 리듬은 해녀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물꾸럭'에서는 시적 화자의 유소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해안가 "원담 돌구멍"을 "눈이 시벌게지도록" 뒤지면서 '물꾸럭(문어-인용자)'을 잡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려지고 있다. 바닷가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에 온몸의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구멍 깊숙이 숨어 있는 문어를 찾아내고자 서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웃음이 입가에 절로 배시시 번진다. 언뜻 나의 망각의 뒤안길에 숨죽여 있던, 탑동 바다 매립되기 전 그곳 썰물 때 유년 시절 친구들과 함께 방과 후 그곳에서 각종 바다 생물(먹보말, 돌킹이, 똥깅이, 따개비, 거북손, 불가사리, 성게, 코생이, 어랭이 등)을 잡고 채집하며 놀던 아름다운 시절이 와락 의식의 표면으로 부상한다. 제주 토건 개발 붐으로 내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소멸했는 줄 알았는데, '물꾸럭'은 봉인된 나의 기억의 저장소에 생명의 힘을 불어넣는다. 지금까지 내가 애오라지 잊고 있었던, 내 삶과 관련이 없다고 간주했던 제주 바다의 생리와 우주적 리듬이 못난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숨죽여 되살아나길 기다려왔던 셈이다. 이야말로 생의 '경이로운 발견'이다. '물꾸럭'은 그러므로 제주어로서 시적 재현의 '구연적 재현­상상력'이 미치는 전율을 자아낸다. 나도 몰래 '물꾸럭'을 소리내 읽는 동안 유년 시절을 소환하여 탑동 바닷가 현무암 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바다 생물을 잡는 시늉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한편, '네 살짜리가 뭘 안다고……'에서 제주 역사문화의 4.3의 언어절(言語絶) 대참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구연적 재현­상상력'으로써 리얼리티를 배가한다. 1연은 서북청년단으로 상기되는 국가폭력의 서북 지역어로, 2연은 이것을 제주어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이다. 새삼 강조할 필요 없지만, 세계사에서 지배자의 언어는 그 타자인 피지배자의 언어를 억압·관리·소멸하는 권력의 위계 관계를 노골화한 만큼 4.3 당시 국가권력을 참칭한 서북청년단의 서북 지역어가 표준어와 함께 반공주의 지배권력의 언어로서 제주어를 쓰는 제주 민중을 얼마나 무참히 짓밟았는지 그 역사적 실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시기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모골이 송연하도록 이들 언어의 위계 관계는 각종 증언에서 또렷이 재연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위 시에서, 서북청년단이 서북 지역어를 잘 모르는 네 살 먹은 어린애에게――당시 제주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제주어와 사뭇 다른 서북 지역어와 표준어가 제주를 지옥도로 만들어버린 공포와 죽음과 저주의 언어로 실감했다.――중산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탕을 미끼 삼아 이러저러한 정보를 캐묻는 싸늘한 대목으로 나타난다.

3.
이처럼 '날혼'은 곳곳에 제주의 역사문화와 생태문화가 제주어를 바탕으로 한 '구연적 재현­상상력'과 '문자적 재현­상상력'이 회통하면서 생성하는 시적 매혹으로 그득 차 있다. 그중 자꾸만 눈에 밟히고 이명으로 남으면서 몸이 움찔움찔 입속을 맴도는 소리와 입말을 거느리는 시편들이 있다. 이것을 제주 무속 연구자 문무병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굿시'라고 범주화할 수 있다. 제주의 무가(巫歌)와 무속신화의 본풀이 양식을 김수열의 시쓰기와 접맥시킨바, 지금­여기의 제주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역사생태적 문제를 응시하면서 그것에 대한 시적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 시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가령, 4.3 시절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죽은 마을 사람들을 추념하는 데 자족하지 않고, 바로 그 땅에 조 농사를 지어 수확한 조로 오메기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죽음의 땅을 살림의 땅으로 전환하기 위한 굿거리('무등이왓 땅살림굿')와, 무등이왓 가을 들녘 조를 수확하면서 부르는 노동요('무등이왓 조 비는 소리')의 시적 재현은 제주 민속문화의 현대시적 변용이 아니다. 대신, 종래 서구 근대문학의 비평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대지에 뿌리내려 대지의 염력을 함의한 '토착적 모더니티(rooted modernity)'의 김수열 식 세계문학으로서 시쓰기로 보는 게 온당하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맨 마지막 시로 '할마님아 설문대할마님아'의 시적 전언과 시적 감응력이 미치는 시의 정치적 역할은 그 어떤 정치사회적 운동의 파급력보다 결코 약하거나 작지 않다. 제주 공동체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분열시키고 있는 제2공항 건설에 대한 시적 저항으로서 김수열의 '할마님아 설문대할마님아'는 제주를 비롯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한 '설문대할마님'께 아직도 미망에 사로잡힌 국가 토건개발주의 및 분단자본주의, 그리고 이것 안팎으로 조밀히 구조화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맞서 제주 공동체 본연의 '토착적 모더니티'의 힘을 절실히 간구한다.

할마님아/혼은 혼반에 넋은 넋반에 주신 설문대할마님아/이젠 혼도 없고 넋도 없는 섬이 되어가려 하옵네다/어스름 새벽에 일어나 상웨떡 돌레떡 구덕에 담고/흰 술 한 병에 계알 안주 등짐에 지고 걷고 또 걸어/정성으로 치성으로 빌고 빌었던 마을 본향이/공항 부지에 들어가면서 없어진다 하옵네다 사라진다 하옵네다/손금이 닳도록 빌고 빌었던 본향이/넋 들일 새도 없이 혼 들일 틈도 없이/신목도 없어지고 흔적도 사라진다 하옵네다 
― '할마님아 설문대할마님아' 부분

그렇다. 제주 공동체가 지닌 '토착적 모더니티'의 힘은 좀처럼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제주를 엄습했던 광풍에 "촌로는 섬이 모질다 하는데/중늙이는 섬이 어질다 한다"('대련(對聯)')고 제주의 힘이 지닌 비의성을 설파하듯, 송당본향에서 "검은 도새기 통째로 삶아 돗제 올린"('돗죽') 후 돗죽을 끓여먹는 제주 사람들의 풍속에는 제주 공동체의 간난신고(艱難辛苦)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함께하며 모두에게 지복이 그득하길 간구하는 '제주 리얼리즘'의 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돗 삶은 국물에 김녕 바당/물숨 그차지멍 호오이 호오이 건져 올린 ᄆᆞᆷ에/다락다락 미끄러지는 겉보리 넣고/궤내기굴 그늘막에 솥단지 걸어 부글부글 부글부글/돗죽 끓인다//천 사람 입에 가면 천복/만 사람 입에 가면 만복
― '돗죽' 부분

고명철

1970년 제주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199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에서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되면서 문학평론가 등단. 4.3문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문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연구와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문학(문화)을 공부하는 '트리콘' 대표. 계간 <실천문학>, <리얼리스트>, <리토피아>,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는 《감응과 교응―'또 다른 세계'를 향한 시적 응전》, 《세계문학, 그 너머》, 《문학의 중력》, 《흔들리는 대지의 서사》, 《리얼리즘이 희망이다》,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mcriti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