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6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황지윤 기자 2025. 6. 3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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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중구 중림동 인근 양식당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6월 독회 추천작은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소전서가)와 전지영 소설집 ‘타운하우스’(창비)입니다.

/소전서가
/소전서가
2023 조선일보 신촌문예로 등단한 전지영 작가. 지난 1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본지와 인터뷰 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창비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불새

본질에 직행하는 소설

신종원은 정공법의 작가이다. 문제의 본질로 직행하는 작가라는 뜻이다. 가령 현실의 혼란을 두고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세상의 세태를 묘사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이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자신이 가정한 쪽에 대한 탐구에 천착하는 작가가 있다. 신종원은 후자에 속한다.

한국문학에는 이렇게 정공법을 택하는 작가가 여럿 있었다. 장용학, 박상륭, 정찬 등이 대표적이다. 필자와 같은 심사위원인 이승우 역시 정공법의 작가로서, 성속의 본질을 다루되 에둘러 간 『식물들의 사생활』이 유럽에서 성공하였다. 그에 비해 성속의 대결을 직접 겨눈 『지상의 노래』는 기독교를 무의식 속에 내장한 서양 독자들이 이상하게도 힘들어한 것 같아서 필자를 무척 안타깝게 만들었다.

여하튼 본질에 직행하는 양상도 다양할 수 있다. 최소의 언어를 가장 깊은 생의 부조리를 푸는 가파른 열쇠로 삼은 사뮈엘 베케트의 헐벗은 문체가 있는가 하면, 모든 수사와 장광설로 문제를 거대한 장관으로 펼치는 살만 루슈디의 화려한 문체가 있다.

여기에서도 신종원은 후자에 속하는 듯하다. 그는 성경, 켈트 신화, 아더왕 전설 등등의 수다한 고대 신화들을 모으고 종교, 도덕, 물리, 수학, 진화론, 언어, 상징 등에 관여하는 온갖 지식들을 버무려 일원화된 앎의 우주를 건설하려는 의욕으로 부글거린다.

이 의욕을 이끌고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정한 진리를 기어이 찾아내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 뒤에는 세상에서의 행동은 끊임없이 허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불안감이다. 이 불안감과 의욕이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작가는 빛과 어둠을 대결시키고, 생명과 죽음을 대결시키며, 신앙과 불신을, 영과 육을, 진리와 거짓을, 참한 사도와 악한 사도를, 기타 등등의 모든 대립자들을 대결시키며, 이 대결에서 이겨 하나의 오롯한 생의 정화를 빚어내고자 한다. 그 대결의 표상을 불새라 한다면, 그 정화의 표상은 성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위험과 악의 기운은 압도적이어서, 불새, 이 생명의 새는 제 안에 죽음의 화염을 불태움으로써만 날게 되니, 그 자신 화염에 싸여 죽음의 나락 쪽으로 긴 포물선을 그린다. 영과 육을, 선과 악을 공평히 담을 성배는 그 포물선의 앞꼬리를 올려주어 양 극단이 평형을 이루게 할 것인가?

작가가 모은 모든 신화와 지식과 사유와 언어는 일제히 그 경건한 목표를 향해 집결한다. 그렇게 소설 『불새』는 화염을 내뿜으며 질주한다.

이 굽이치는 지식 질료들의 대양을 헤쳐나가는 소설이라는 배는 크기를 늘려갈수록 당연히 직면해야 할 문제들을 더욱 빈번히 마주치게 된다. 그 하나는 동원된 자원들이 이질적이면서 광활한 공간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출몰할수록 그들 사이의 ‘관여성pertinence’의 여부이다. 생명 대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사항은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 사항과 여하히 맞물릴 것인가? 성경과 아더왕 전설 사이에는 정말 교통로가 열려 있는가? 그 둘은 이 자원들의 등장의 ‘필연성’의 여부이다. 성배는 작가가 가정한 저의 역할을 정말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가정은 실제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 한국의 국적을 가진 수도자는 꼭 필요한 것인가? 그 셋은 대결의 전제의 타당성이다. 이 모든 대결은 이미 패배를 안고 가는 선한 의지 혹은 영육의 고난으로 요약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은 정말 옳고 악은 정말 그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의 우주에서 미리 전제된 심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은 그 영역이 광활한 만큼 그에 대한 아주 다른 대답들이 무수히 존재해왔다. 그러니 그 해결은 오로지 작품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불새』는 진리를 기어코 찾겠다는 본래의 의욕에, 그 편력의 모든 세목들에 합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임무를 겹쳐 놓고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며 날아간다. 모든 불새의 형상이 그렇다면 그것은 신종원만의 불새가 될 것인가?

그래픽=정인성

♦타운하우스

병신붕가망국와천하(病身崩家亡國瓦天下)

전지영의 『타운하우스』(창비, 2024.12)는 사적 공동체 즉 가족의 붕괴를 집요하게 캐고 있다. 굳이 사적 공동체라고 지칭한 것은 ‘공적 공동체’라고 가정된 공간이 있기 때문이고, 표면적으로 보아 후자가 전자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공적 공동체는 학교 폭력이 발생한 학교의 학부모 모임, 장교 관사, 시청 등 공적 관계로 이루어진 다양한 장소들이다.

이 두 공동체를 둘러싸고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나는 이 두 공동체 사이에는 화해시키기 어려운 이해 충돌의 확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이 둘 사이의 갈등 관계는 양쪽 모두에 다양한 방식의 심리적·물리적 상해를 입히다가, 삶의 지수를 극도로 낮추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하강하는 삶의 세목들에는 생활의 제약과 곤란, 사람에 대한 불신, 심리적·육체적 이상 등등 모든 생명 활동의 항목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지영의 단편소설들에는 이러한 부정적 상황의 속성에서, ‘아’와 ‘피아’의 대결이라는 사회진화론적 양태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단편소설의 기본 구도는 개인과 세계의 대결로 나타나기 일쑤이며, 이때 세계는 ‘악’, 개인은 ‘피해자’(혹은 순진성으로서의 선[善])의 외양을 띠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악행’과 ‘피해’의 대립 구도가 주장되지 않고 오히려 모두가 모두에 대해서 나쁜 작용을 하는 양태로 현상을 묘사한다.

“자연에서 만물은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얽혀 있고 함께 변화한다. 만물은 서로서로 겹쳐진다”(고트홀드 레싱Gotthold Lessing)는 ‘만물교호’의 원리가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이라는 ‘만물 알력’의 냉혹한 법칙으로 현상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데, 그 네트워크에 병(disorder)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하락의 원인으로 대체로 불가항력의 우연한 사고가 제시되어 있는데, 실상 그 사고는 원인이라기보다는 병의 증상적 돌출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오히려 문제는 이 공동체 내외의 관계 그 자체다. 즉 여기에서의 공적 공동체란 공익으로 위장한 사적 이익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고 그에 반발하는 가족의 사적 공동체 역시 그 사익에 대한 추구를 공유하면서, 그 여파에 대한 시야가 ‘당장의 이익’이라는 지극히 편협한 계산을 통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공동체의 넓이를 지탱할 만한 여력과 움직임은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즉물적인 욕망들만이 그럴듯한 이유를 등에 업고 난무하는 것이다.

이 소설들의 매력은 이러한 ‘만물 알력’의 원인을 진지하게 숙고하게 하는, 길게 이어지면서 굽이치는 심리적 번민들이다. 사고로 인한 충격, 그 사고에 대한 변명 및 가해자에 대한 원한, 저질러진 사건의 회복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 더 나아가 이 사고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책임감이 가하는 심리적 압박, 즉 한순간의 방심에 대한 죄책감, 적당한 타협, 무시한 외면에 대한 수치심 등등의 번민들이 충동적으로 출몰했다가 산만하게 변주되면서 서로서로 얽혀들면서 인물들의 가슴을 옥죈다. 그리고 주위의 온갖 사물과 대기에 이 괴로운 마음들이 투영되어 괴이한 색깔을 띠고 위협적인 빛을 발하면서 환경 전체를 위협적인 공포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상황의 묘사는 독자를 하여금 마음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부추기고, 생각 있는 독자는 그 추동력에 얹혀서 이 현실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불새

신종원의《불새》는 두껍고 딱딱하다. 무려 409쪽에 이른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정색을 하고, 끝까지 친절하지 않다. 이런 이야기는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다. 작가마저 통제하지 못한, 일종의 영적 기운 같은 것이 서려 있는 듯하여 하염없이, 그야말로 하염없이 붙들리게 된다. 어쩌면 작가마저 종교적 혹은 심리적 정동 상태에서 마치 공수를 내리듯 글을 쏟아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전혀 색다른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의 기이한 재주라고밖에 더는 뭐라 할 수 없겠다. 최후의 만찬에 쓰였다던 예수의 잔―도난당한 그 성배를 찾아가는 사제의 이야기니 어쩌면 들린 듯한 문장이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임신한 성가대원 여학생 헬레나의 자살 충격으로 사제복을 벗고자 하는 젊은 한국인 신부 바오로. 이를 극구 말리며 스페인 발렌시아 대성당의 성배를 배알하라 권하는 아버지 신부 베드로.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 도난당했던 성배를 되찾기까지 바오로 신부와 우연히 연결되는 전직 테러리스트 페트리……. 이와 같은 흥미로운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있던 것이 없어졌다가 다시 제자리에 있게 되는’ 이치를 《불새》에서는 1-0-1의 디지털 방식으로 등식화하며 그것을 무한의 반복, 영원한 회귀, 차이와 반복 등으로 명명하고 싶어 한다. 마치 ­­과 —이, 같은 방식으로 반복하되 무한 변화(易)를 야기한다는 주역의 원리와도 같아 보인다. 이야기가 헬레나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헬레나의 부활을 기원하는 장례 미사로 끝나듯이, 있다가 없다가 다시 있게 된 성배 이야기의 배경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없을 수 없다. 1-0-1. ‘나고 죽음, 죽음과 다시 남’이 주는 상징 효과의 효용 범위는 특정 종교계를 떠나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그 중 하나의 효용으로써 소설, 즉 fiction이라는 현상을 따져보는 데 《불새》를 써 봐도 특별히 이상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잃어버린(죽은/없는) 성배를 우여곡절 끝에 되찾는다는(살리는/있게 하는) 이야기. 최후의 만찬에 쓰였던 성배 이야기니만큼 거기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서사가 빠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죽은 여학생의 부활과 애절하게 연결시킨다는 것. 이야기는 이처럼 간단해 보이며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불새》를 들여다보면 결코 간단하지 않다. 《불새》를 읽는 일이, 아닌 게 아니라 불새를 눈앞에 맞닥뜨리는 일처럼이나 눈부셔 눈을 뜰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을 뜰 수 없으니 읽을 수 없다. 줄거리로 보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어째서 이렇게 써야만 했던 것일까. 어찌하여 이토록 종횡무진(無盡), 무애(無礙), 무우(無隅)하게. 《불새》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무엇은’은 간단하나 ‘어째서’는 사뭇 현란하고 복잡하여 어지럽기까지 한데, 문제는 그 현란하고 복잡한 와중으로 하릴없이 빨려 들어가 헤어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그 까닭을 곰곰 생각하다 보면 성배의 있음과 없음, 그리고 다시 있음의 부활 순환 구도와 더불어, 서사의 있음과 없음과 다시 있음의 구도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불새》에서의 성배는 다름 아닌 서사 그 자체이기도 한 것. 출처와 정체를 알 수 없던 술잔에 서사가 창작되고, 마침내 거룩하게 부회(附會)된 성배 서사의 기원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또 하나의 서사를 통과하며, 《불새》와 같은 현란하며 복잡한 서사로 재탄생하는 것도 1-0-1의 무한 반복의 소설적 예시가 아닐까. 어째서 현란과 난삽이 소설적 예시가 되어야 했느냐면, 0, 즉 죽음과 잃음과 없음과 의심과 부정이라는 와해와 소멸의 요소를 소설의 형식에 담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카이로스적 적용이 불가결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소설과 소설의 언어가 자기 뼈를 해체하고 다시 맞추는 환골의 과정을 겪는 것.

《불새》가 두껍고 딱딱하다고 했거니와, 그런 책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벽돌이라고 불린다. 《불새》는 표지마저 균일하게 붉은 벽돌 색깔이다. 벽돌을 쌓으면 탑이 되는데 언어의 벽돌로 쌓은 탑이라면 아무래도 바벨탑이겠다. 무너져야 할 탑. 무너져야 할 탑은 탑 안에 무너질 구실들을 차곡차곡 내재하기 마련인데, 그런 거라면 《불새》에는 눈부실 만큼 가득하다.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이리되면 0에 성공하게 되는 셈.

fiction은 소설이라 번역되지만 허구(虛構)로도 번역된다.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뜻이다. 당초에는, 처음 순간에는 (성배가 그랬듯이) 없는 것이었거나 아니었던 것[虛]에 꾸밈[構]이 가해지는 것이 허구다. 꾸밈은 거짓이고. 그러나 fiction으로서의 소설은 그토록 거짓이어서 ‘더는 거짓이 될 수 없는(거짓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성배로 거듭난다. 거듭남의 전(前) 과정으로서 필요한 바는 무너짐, 즉 죽음과도 같은 몰락의 초래며 이러한 위반의 절차들은 바벨탑의 붕괴를 지나 마침내 안티고네적 문학의 윤리에 이른다. 바오로 신부가 가톨릭의 엄격한생명 윤리를를 어기고 자살한 죄인 헬레나의 영혼에장례 미사를를 주례하는 불충과 위법이야말로 부활의 참된생명 윤리인인 것처럼.

신종원의 4원소론을 빌리면 벽돌도 지-수-화-풍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흙과 물을 선택하더라도 불과 바람 없이는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야콥슨이라면 자신의 언어학에 비유해 말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벽돌을 소설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지금 중요한 것은 신종원의 벽돌들은 언제든 스스로 무너질 허구임을 자임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은 늘 부활 이미지의 갱신을 거듭하며 지속될 거라는 믿음을 준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타운하우스

전지영의 소설들은 잘 지어진 집을 떠올리게 한다.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우선 그의 소설들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다. 튼튼하고 보기 좋은 구조물이 되려면 부분을 이루는 재료들이 전체를 이루는 데 협조해야 한다. 각각의 재료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를 만든다. 재료 선택도 중요하지만 배치도 중요하다. 제 위치에 놓이지 않으면 구조물은 불안정해진다. 소설이 일종의 조형물이라는 사실을 이 작가의 소설들은 새삼 일깨운다. 이런 소설을 쓸 때 소설가는 정교하고 꼼꼼한 장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섣부른 개성이 아니라 검증된 작법으로 쓴 글이 안정적이지 않을 리 없다. 플롯으로부터 자유로운 세태와는 분명 다른 경향이다. 이 작가가 덜 눈에 띈다면 그것은 안정적인 것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작가의 목소리에 쉬 반응하는 시대 현상과 관련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이 소설집에서 ‘작가’가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은 이 작가가 ‘작가’를 돋보이게 하려는 욕심을 잘 절제했기 때문이거나 자기 작품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심을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인은 작품 앞으로 잘 나서지 않는 법이니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실제로 집이라는 공간을 돋보이게 부각하기도 한다. 「말의 눈」의 타운하우스, 「소리 소문 없이」와 「언캐니 밸리」의 붉은 벽돌로 지은 청한동의 3층 저택, 「쥐」의 해군 관사, 「뼈와 살」의 동도 시영아파트,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의 사격장 주변 아파트, 그리고 「맹점」의 어시장 내 안과병원까지 집은 작품의 중심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집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강한 상징성을 띠고 주제에 관여한다.

외부와 구별된 각각의 집들은 개인이 그런 것처럼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은 물론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거기 거주하는 이들은 적응해야 한다(“관사 여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건 그런 형편 때문이기도 했다.”(「쥐」)). 집은 태풍, 폭설, 호우와 같은 외부 충격에 허약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짜 위험은 자연재해와 같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문제는 타운하우스 내부에 있었다.”(「말의 눈」) 집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한 소설에서 ‘쥐’로 대변된다. ‘쥐’는 보이지 않는데(“눈에 보이는 건 답이 아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표나게 암시한다.

튼튼하고 매끈한 저택에 사는 부부(고 박사와 신 박사)는 그 높은 담 안에서 미워하고 싸우고 갈등한다. 그러나 이런 내부의 혼란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집이 인간을 상징한다면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회칠한 무덤 안은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태풍과 폭설 같은 외부의 자극이 가끔 균열을 내지만, 그 균열은 집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방어 본능에 의해 다시 메워진다. 전지영의 소설에서 소문이 중요한 키가 되는 연유를 알 것 같다. 은폐된 진실은 보이지 않는 쥐와 같은 소문의 형식으로 그의 소설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 책에서 읽은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말의 눈이다. 타운하우스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은 골칫거리다. 소문 속 진실과 대면하라고 요구하며 우리 주위를 맴돌기 때문이다. 말은 부정하고 은폐하고 피하기만 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안개 사이로 검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짙은 갈색 말 한 마리였다.(…) 말의 눈은 검은 웅덩이 같았다. 깊고 투명하고 맑았다. 수연은 그 눈에서 자신을 보았다.”(「말의 눈」) 수연은 그 눈을 부정한다. 우리가 그런 것처럼. 그래도 말은 천천히 다가온다. 자기 정체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아마 소설을 의문형으로 끝낸 게 아닐까.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이 질문은 독자를 향한 말의, ‘투명하고 깊고 맑은’ 눈이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타운하우스

“이 도시에 정착한 뒤부터 키가 자라지 않았다.” 전지영의 소설집 ‘타운하우스’에 수록된 단편소설 ‘언캐니 밸리’에 나오는 문장이다. 주인공은 크로키 화가이면서 야간 택시 운전을 하는 왜소증 환자이다. 앞의 문장은 이 주인공을 설명하는 주요 포인트로 여겨진다. 이 소설의 핵심에 관한 것이기도 할 테다. 동시에 질문이기도 하다. 이 문장이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진 어느 날 밤 주인공은 언덕 위 부촌으로 향하는 여자 손님을 태운다. ‘일하지 않아도 잘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어느 부잣집 고용인인 이 여자는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다니까요. 말할 필요도 없어요. 같이 밥 먹을 의무도 없고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돼요. 책 읽고 영화 보고.”

폭설의 밤, 언덕의 중간, 왜소증 환자와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 여자의 대화에는 방향이 없다. 사람과 동물의 사지가 서로 연결되어 그려진 주인공의 크로키처럼 ‘너무 매끈한데’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 사이에 뭔가가 있을 것이다. 실은 매끈하지 않고, 실은 매끈하지 않은데 자연스러운 것. 그러나 쉽게 말해지지 않는 것.

이 소설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사람,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문장들이 반복해서 나온다. 불편하고 불안한 진실 사이에는 강요된 침묵, 혹은 조작된 침묵이 존재하고, 그 사이에는 독자들로서는 알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이 소설은 사뭇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왜소증 환자의 과거나 그가 그리는 크로키 때문도 아니고, 이 여자 손님이 당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염산 테러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뿐더러,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작가가 줄곧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중 주인공들은 항상 중간에 머문다. 언덕 중간, 동물과 사람의 중간, 그리고 마침내 담장 안과 밖의 사이. 이 소설에서 가장 친절한 것은 제목이다. ‘언캐니밸리’ 이 이상하고 기괴하고 음산한 곳에서 독자들은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

소설집의 제목이 ‘타운하우스’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공간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음산한 사건들. 해결의 기미는 없다. 비밀의 단서는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공간, 어떤 집에서 살고 있거나 주인공들은 출로를 찾아 분투하지만 결국 같은 자리다. 같은 자리인데 기묘하게 더 불길해져 있다. 지나치게 잘 설계된 미로에 갇혀버렸다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매끈한’ 이 소설들은, 그래서 더욱 출구가 없어 보인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불새

한국의 바오로 신부는 성가대원이었던 헬레나의 임신에 대한 고민을 듣고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근거해서 조언을 한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이 조언은 헬레나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생명을 존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이, 또 다른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어마어마한 억압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건은 바오로 신부의 믿음을 근원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고, 바오로 신부는 신부 직을 그만둘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에 아버지 신부 베드로는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는 조언을 했고, 바오로 신부는 스페인 발렌시아 성당으로 떠난다. 하지만 스페인의 정치적 분쟁과 연관된 성배 도난 사건이 벌어지게 되고, 소설 <불새>는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21세기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배가 겪어온 역사적 상황들을 치밀하면서도 목소리들을 통해서 재구성해내고 있다. 성배의 역사와 향방을 묻는 소설의 발자국들에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가로놓여 있다. 생명과 죽음, 폭력과 희생이라는 현실의 대립과 모순을 넘어 생명이 생명으로 부활하는 지점에서, 결코 소멸하지 않고 반복되는 생명의 형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생명의 근원적인 형상을 불새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종원의 <불새>는 꽤나 안 읽히는 소설이다. 문법적으로 문제가 될 비문은 없고, 수식 과잉의 몽롱한 문체도 아니지만, 성배 찾기와 관련된 서사의 기본적인 맥락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성배와 관련된 많은 지식과 정보를 한데 끌어안고 있는 작가의 문체는, 소설을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는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가 아니거나 성배와 관련된 지식이 부족한 경우, 소설의 서사적 맥락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배와 관련된 역사적 상황들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게 하는 소축적 지도 한 장만 마련하면 소설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의외의 재미와 감동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성배의 장소와 관련된 간단한 배경지식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배는 최후의 만찬 당시 예수의 피로 성변화한 포도주를 담았던 잔을 말한다. 인터넷의 사전에 의하면, 성배는 기원전에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진 수수한 돌잔이었으며, 예수가 승천한 뒤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사용했으며, 이후 박해를 피해 현재의 이베리아 반도인 히스파니아 지방으로 옮겨졌고, 무슬림들의 침략을 피해 스페인의 발렌시아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20세기에는 스페인 내전을 피해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발렌시아 성당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소설 <불새>가 고대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8세기의 이슬람 왕조, 켈트 신화, 신화, 아더왕 전설의 갤러헤드 이야기, 스페인 내전, 바스크 분리주의 투쟁 등을 참조하고 재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성배의 역사적 행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이 흥미로우면서도 우리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소설 읽기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붙들고 생명의 생명(불새)과 만나고자 하는 소설의 욕망이 참으로 눈부셨다. 처절해서 숨이 막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언어의 밀도가 400페이지가 넘는 소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에 대해 묻는 작가를 간만에 만났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두 번째 독서라고 해서 쉬워질 것 같지는 않지만,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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