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웅 선생 한글전용 연구와 생활 속 실천에도 더욱 힘써"
"허웅 선생, 맹목적 아닌 실증적 한글운동"
"국내 국어학계에서 최초 업적 가장 많아"
"한뫼 선생 후속 연구 어렵지만 국가인물로"

한글의 탁월함을 연구하며 민족정신을 일깨운 김해 출신 국어학자인 눈뫼 허웅 선생과 한뫼 이윤재 선생의 생애와 학술 업적이 재조명됐다.
(사)경남향토사연구회 김해지회(지회장 심용주)가 지난 27일 김해문화원에서 김해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눈뫼와 한뫼 선생을 기렸다. 이날 허영호 김해지회 향토사 연구위원이 좌장으로 이근열 부산대 국문과 교수의 '허웅 선생 국어사랑에 대하여', 김정대 경남대 국어국문과 교수의 '허웅 선생의 우리말글 연구에 대하여', 김선옥 김해지회 향토사 연구위원의 '한뫼 이윤재 선생 국어사랑과 독립운동' 주제 발표가 진행됐다.
눈뫼 허웅(1918~2004) 선생은 한글학회 회장을 33년간 맡으며 국어 문법 체계를 확립한 학자다.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반대하고 한글전용운동에 힘썼으며 연구와 실천을 함께 했던 학자였다. 그는 한글을 과학과 철학과 예술의 종합체 및 민족 문화의 밑거름으로 여기고 한글 부흥에 힘썼다.
허 선생은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며 한흰샘 주시경 선생과 외솔 최현배 선생을 은사로 공부했다. 허웅 선생은 "한흰샘 선생이 국어학의 기틀을 잡았고 최현배 선생이 집을 지었다면 나는 그 마무리를 했을 뿐이다"고 밝힐 만큼 겸손한 학자였다.
이근열 교수는 "눈뫼 선생은 맹목적 한글 운동이 아닌 실증적 한글 운동을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고 밝히며 한글 전용 운동에 앞장선 허 선생을 탁월함을 밝혔다. 또 동래고보 재학 당시 양산 출신 나진석 한글학자와 학업 성적 1, 2위를 다퉜는데 1등을 놓치지 않았다가 딱 한 번 2등을 했고 그때가 학교를 나가지 않았던 때라고 하는 일화도 전했다.
김정대 교수는 이어진 발표에서 "허웅 선생은 우리나라 국어학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받는 업적을 가장 많이 낸 분, 공시태와 통시태를 넘나든 분, 언어학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분, 자신의 논저에 책임을 지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목적어도 객체 높임이 가능하다는 객체 존대설에 대한 학자들 간의 논쟁에서도 겸양하는 태도를 갖고 논쟁에 임할 만큼 인격이 높았던 분이다"고 말했다. 이어 "눈뫼 선생은 15세기 문헌을 통해 목적어 자리에 객체높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대학 학부생 시절에는 심학 선생에 매료됐지만 깊은 공부를 통해 눈뫼 선생을 공박한 심학 선생의 논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뒤늦게 알았다"고 전했다.
한뫼 이윤재(1888~1943)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돼 56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했다. 그의 아들 이봉갑이 월북을 해 한뫼 선생에 대한 후속 연구가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서거 뒤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하다 1946년 유해를 수습했다고 한다. 김선옥 연구위원은 "한뫼 선생은 밀양시 내이동이 본적지로 돼 있는데 후손들이나 친인척들이 연로해 연락이 잘되지 않아 후속 연구를 할 수 없어 아쉽다"며 "한뫼 선생을 제대로 국가적 인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뫼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루돼 수감생활을 한 기록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대전현충원에 유해가 있다. 김 연구위원은 이윤재 선생이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활동도 했으며 신촌의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 "조선총독부를 통과하는 전차 삯 5전도 왜놈에게 주기 싫어 걸어 다녔다"고 할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으며 김해 출신인 만큼 대가락국에 대한 애착도 많았다고 전했다.
이날 종합 토론에서 이근열 교수는 "말과 정신은 연결되는 것이라는 눈뫼와 한뫼선생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일상생활 언어에서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쉬운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배움의 가장 큰 가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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