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시론] 다락과 마루- 김은영(경남도립남해대학국제교류센터 교수)

knnews 2025. 6. 29. 19:3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라는 책에서 어린 시절 처음 글을 읽게 된 순간의 감동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마침내 나도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을 깨침으로써 드디어 세상의 비밀에 다가서는 열쇠를 얻게 되었고,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음을 표현한 말이다.

필자 역시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 글을 배웠던 때의 재미와 흥분을 지금껏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읽는 일이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참새 방앗간처럼 등굣길 만화방에 들렀다가 지각해서 선생님의 주의를 들었던 때가 겨우 1학년 때의 일이니 말이다.

학년이 바뀌면서 필자의 독서 공간은 주로 부엌방에 딸린 다락 위로 바뀌게 됐다. 연년생 남동생들의 등쌀을 피해 숨을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다. 특유의 케케묵은 곰팡내가 배어 있었지만, 거기 배를 깔고 엎드리면 혼자 몰래 책을 읽기 그만이었다. 초여름 다락방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문득 소나기가 쏟아지면, 빗소리보다 먼저 들창을 뚫고 풀썩 올라오는 알싸한 흙먼지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 필자가 일생 최초로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의 기억이다.

책을 읽는 일은 다양한 형태의 삶을 미리 경험하고 인생에 대한 전망을 얻는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 영혼에 깊이를 더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혹은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읽어야 한다. 읽는 행위는 숨 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행위다.

필자가 소속한 남해대학은 인구 4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섬에 자리 잡고 있다. 섬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요함을 품고 있다. 책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이다. 말보다 침묵이 깊고, 속도보다 호흡이 넉넉한 곳. 그래서인지 남해에는 동네마다 바다를 품은 풍경 속에 책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작은 책방이 많다. 그만큼 이 지역의 독서 문화는 깊고 새롭다.

이제 그에 더해, 남해에 책 읽기 좋은 장소가 한 군데 더 생겨난다. 바로 7월 1일 개관하는 ‘남해책마루도서관’이다. 남해대학이 새 도서관을 짓고, 재학생과 지역민 모두에게 책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지는 책마루로 개방하게 됐다.

남해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다. 육지와 닿아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곳. 이곳에 대학이 있고, 그 안에 모두를 향해 열린 새 도서관이 들어선다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책마루’라는 이름도 우리 전통한옥의 마루처럼, 이 도서관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자리가 되기를, 책이 읽히고 들리고 나누어지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이 말에는 ‘도서관’이라는 단어에 담기지 않는 사려와 숨결이 담겨 있다. 이 이름에서 우리는 햇살 살랑이는 오후의 툇마루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어린 시절 다락방에 숨어 혼자만의 책을 읽던 필자 역시 이 책마루 한편에 앉아 행복해할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도서관은 본래 책이 있는 곳이지만, 진짜로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책이 쌓이는 만큼 사람이 오지 않으면, 그곳은 창고가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책마루’를 꿈꾼다. 단지 책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라 책 속의 문장이 나의 말을 불러오는,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이 마주할 수 있는 마루 같은 공간. ‘남해책마루도서관’은 그래서 더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남해의 시간 위에 마루 하나를 놓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은 셈이다. 아무쪼록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책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만들어나가기를. 말 없는 환대의 자리. 바로 그런 도서관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김은영(경남도립남해대학국제교류센터 교수)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