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없었다면, 12.3 비상계엄 때 무슨일이..."
① 박구용 전남대 교수
"80년 5월 광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
5월 27일 도청지켰던 210명 희생 내란 극복 원동력

"5·18 광주,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렸다."
박구용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말이다. 2024년 12월3일 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1980년 5월 계엄군에 맞서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전일빌딩·YWCA 일대를 지켰던 230여명의 희생이,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 침탈로 상징되는 내란 극복의 원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광주를 지켰던 그들은 10∼30대가 대다수였다. 옛 전남도청 경찰국 2층 복도에서 고등학교 교련복을 입은 채 희생됐던 문재학·안종필 열사 등이 대표적이다.
박 교수는 "80년 5월26일 오후,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마지막 시민대성회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아 항쟁의 의의·가치를 알릴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면서 "만약 '그날' 모두 도청을 비우고 떠난 채 항쟁이 끝났다면, 우리 안에 '그게' 남아있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를 계속 불편하게 하고 짓누르며, 부끄럽게 만드는 모든 것이 마음속 어딘가에 부채 의식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거다.

살아남은 자들의 감정은 복잡했다. 고마움과 미안함, 죄의식에 짓눌렸다. 박 교수는 "옛 도청에 남았던 그들의 고뇌와 선택, 희생 등이 너무 아름답다"면서 "항쟁 과정에서 시민들의 모습이 미학적으로 말하면 가장 비극적인 요소가 강한데, 그게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까지 승화됐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계속 남아있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와 반동.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에겐 그만큼 감추고 훼손해야 할 치부였다. '광주의 피', 5·18이 집권의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환 같은 가치 체계를 갖거나 그 가치관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5·18은 너무 미운 것이었다"며 "그냥 역사적 사건이면 지워버리면 되는데, 자기들이 들여다보면 너무 숭고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정당하려면 5·18 정신·가치 등을 훼손시켜야 했다"고 지적했다.

"5·18은 질적인 의미의 숭고미가 있다. 반란을 일으켰던 전두환 신군부 측은 그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그걸 끝없이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5·18은 그렇게 아름다운 숭고미로 우리 역사와 가슴 속에 남아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다시 5·18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배경이다."
광주 시민들이 가해자가 아니란 점을 밝히고 증명해 내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에 담긴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도 80년 5월 광주의 유산이다. 박 교수는 "12·3 때 군인들은 겉으로 보기엔 소극적 행동이었지만 사실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이라며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들이 '그때 얼마나 잘못됐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이 같은 행동으로 표출됐다는 게, 홍장원 전 국정원 차장의 증언과 그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말했다.
광주의 희생은 국민 기본권 보장의 디딤돌이 됐다. 헌법 37조 2항 '기본권 조항은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그는 "유신정부 때 없어졌다가 5·18 이후 만들어졌다"면서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도 본질적인 요소는 침해할 수 없다는 게 헌법정신인데, 국가가 아무리 대단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의 본질적인 요소는 침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유지호기자 hwaone@mdilbo.com·강주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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