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간 여자를 병에 담았다”…시칠리아 지방에서 벌어진 슬픈 역사 [전형민의 와인프릭]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Giuseppe Tomasi di Lampedusa)의 소설 ‘표범’(Il Gattopardo)은 이탈리아 통일기(리소르지멘토)라는 격변의 시대 속 몰락해가는 시칠리아 귀족 가문의 삶과 변화를 그린 역사 소설입니다.
작가 사후인 1958년 출간했는데 곧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탈리아 최고 문학상인 스트레가상(Strega Prize)을 수상하면서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계문학전집 등 여러 번역본이 출간됐습니다.
소설 ‘표범’이 이탈리아인들에게 국민소설이자 세계적인 명작으로 불리는 것은 귀족 사회의 몰락과 시대 변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깊이 있게 다뤘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신과 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전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시대의 큰 변곡점에서 인간 군상을 깊이 있게 조명하며 세대와 계급, 가치관의 변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문학과 비교하자면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 살리나 공작 가문의 여름 별장과 그가 다스리는 마을(영지)의 이름으로 ‘돈나푸가타’(Donnafugata)가 등장합니다.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머무르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주 무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시칠리아에는 ‘돈나푸가타’라는 이름의 와이너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와이너리는 모티브가 된 소설 ‘표범’보다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물론 와인으로요.
와인 업계에서는 돈나푸가타를 아예 ‘시칠리아 와인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 르기도 하는데요. 이탈리아 국민 소설의 이름을 딴 와이너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있을까요.
“If we want things to stay as they are, things will have to change.”(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소설 ‘표범’ 속 탄크레디
![돈나푸가타 포도밭에서 자라고 있는 양조용 포도. [나라셀라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mk/20250628091202726awcv.jpg)
시칠리아의 역사적 사건을 알고 있던 시칠리아인 작가가 이를 소설에 차용했고, 소설의 유산을 계승하길 원한 시칠리아의 명망있는 와인 양조 가문이 후에 자신들의 와인 브랜드로 사용한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현재 돈나푸가타의 핵심 포도밭이 자리한 콘테사 엔텔리나(Contessa Entellina)의 저택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돈나푸가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와인 라벨, 그리고 와인에 담긴 스토리텔링의 근간이 됐습니다. 돈나푸가타 와인의 라벨에 그려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여인이 바로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입니다. 비운과 자유, 그리고 시칠리아의 신화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겁니다.
재밌는 것은 작가인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는 실제로 시칠리아 최남단, 튀니지와 몰타 사이 작은 섬인 람페두사를 다스리는 공작 가문(Prince of Lampedusa)의 마지막 귀족이었다는 점입니다. 시칠리아를 영지로 가진 공작 가문의 이야기인 소설 ‘표범’은 어쩌면 귀족 시대의 몰락기를 마주한 작가 본인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We were the Leopards, the Lions; those who‘ll take our place will be little jackals, hyenas. We’ll all continue to think ourselves the salt of the earth.”(우리는 표범이었어. 그리고 사자였지. 앞으로는 자칼과 하이에나가 우리를 대신할 거야. 모든 것이 달리지고 상황이 안 좋아질 거야. 우리 모두 자신이 세상의 소금인 줄 알겠지.) -소설 ‘표범’ 속 살라니 공작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의 가장 상징적인 포도밭인 콘테사 엔텔리나(Contessa Entellina)의 전경. [나라셀라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mk/20250628091204054rbpd.jpg)
랄로 가문은 오랜 시간 동안 시칠리아 땅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며, 그 정신을 와인에 담아왔습니다. 와이너리의 포도밭은 기원전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엘레미안 문명의 터전 위에 세워졌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문화 유적이기도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돈나푸가타는 지역 토착 품종의 보존과 전통 양조법의 계승에 힘써왔습니다. 일찌감치 국제품종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가진 네로 다볼라, 그릴로, 프라파토 등 시칠리아 고유 품종을 중심으로 다양한 테루아에서 포도를 재배·양조합니다.
특히 가문의 와이너리가 있는 시칠리아 인근 판텔레리아 섬에서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고대 알베렐로(Alberello) 방식의 재배법을 보존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전통적 농법은 와인에 시칠리아만의 개성으로 불리는 강렬한 햇살, 화산토, 바닷바람 등 토착 품종 포도에서 나타나는 풍미를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A house of which one knew every room wasn’t worth living in.”(모든 방을 다 아는 집은 살 가치가 없다.) -소설 ‘표범’ 속 살리나 공작
![활화산인 에트나산 북쪽 경사면에 위치한 돈나푸가타 란다쪼(Randazzo) 와이너리의 바리크 셀러. [나라셀라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mk/20250628091205354bvqc.jpg)
면적만 넓은 게 아닙니다. 가장 높은 동부 에트나 산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높이는 해발 약 3350m에 달하는데요. 결국 시칠리아는 0m부터 3350m까지 다양한 고도를 갖춘 겁니다. 덕분에 섬 안에 산악부터 구릉, 평야, 해안, 화산 등 다양한 지형이 존재합니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온화하고 습합니다. 시칠리아 전체적으로는 연중 평균 일교차가 5~7℃에 불과하지만,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로코(Sirocco)라는 뜨거운 바람이 한겨울에도 섬의 온도를 일시적으로 30℃에 가깝게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지형적 특성 덕분에 시칠리아 섬 안에서는 유럽 각 지역의 특성이 모두 관찰됩니다. 개별 지역의 떼루아라고 부를만한 특성이 섬 한 곳에서 모두 나타나는 겁니다. 돈나푸가타 와이너리는 오랫동안 시칠리아에 뿌리내린 덕분에 바다를 마주한 토양에서 언덕, 산악 지대까지 다양한 포도밭을 소유했습니다.
“They are coming to teach us good manners! … But they won‘t succeed, because we are gods.”(그들은 우리에게 예의를 가르치러 온다! … 하지만 그들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신이기 때문이다.) -소설 ‘표범’ 속 살리나 공작
![돈나푸가타 마르살라 와이너리 실험실의 모습. 혁신적인 생산 공간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나라셀라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mk/20250628091206677hpdg.jpg)
예컨대 안띨리아(Anthìlia)는 고대 로마 시대 콘테사 엔텔리나 언덕 위에 있던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기원전 3세기 엘리미(Elymian) 문명이 포도 재배를 시작한 곳으로,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의 뿌리이자 시칠리아 와인 역사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라벨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려져있는데요. 이 이미지는 엘리미 문명의 신비로움과 시칠리아의 자유, 바다의 바람, 그리고 자연과 역사의 조화를 상징합니다. 19세기 시칠리아로 피난 온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슬픔과 자유로움을 투영한 이미지로도 해석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돈나푸가타 와이너리의 공동 창립자 가브리엘라 랄로(Gabriella Anca Rallo)가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탈출’해, 남성 중심의 와인 산업에 뛰어들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실제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과 도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탄크레디(Tancredi)는 소설 ‘표범’에 등장하는 주인공, 살리나 대공의 총애를 받는 매력적이고 영리한 조카로, 변화하는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는 인물입니다. ‘tan’(용기, 강인함)과 ‘cred’(신념, 믿음)에서 비롯되어 ‘용감한 믿음’, ‘강인한 신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소설에서는 전통 귀족 사회와 새로운 혁명적 가치의 교차점에 서 있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돈나푸가타의 ‘탄크레디’는 1990년, 시칠리아 토착 품종(네로 다볼라)과 국제 품종(카베르네 소비뇽, 탄나트 등)을 혁신적으로 블렌딩해 탄생했습니다. 전통과 혁신, 귀족적 품격과 현대적 감각의 조화를 상징하며, 시칠리아의 변화와 진취성을 담고 있습니다.

시칠리아 토착 품종인 네로 다볼라(Nero d’Avola)를 중심으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멀롯(Merlot), 시라(Syrah) 등 국제 품종을 블렌딩했습니다. 돈나푸가타는 이 이름을 통해 전통과 현대, 귀족과 신흥 계급의 만남, 그리고 시칠리아의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리게아(Lighea)는 소설에서 ‘태양의 색을 담은 흩어진 머리카락과 녹색을 띤 큰 눈’으로 묘사되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바다의 요정으로 등장합니다. 시칠리아의 햇살과 바람, 신화와 예술이 어우러진 꽃향과 과일향을 산뜻하고 오묘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판텔레리아 섬의 강한 바람과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자란 포도를 수확해 양조한 와인, 벤 리에(Ben Ryé)는 아랍어로 ‘바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연중 강풍이 불고, 이 바람이 포도송이와 포도밭을 감싸며 독특한 향과 풍미를 만들기 때문에 자연과 떼루아, 시칠리아와 지중해의 바람, 독특한 단맛과 신선함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라벨에는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가 피난했던 산타 마르게리타 디 벨리체의 궁전이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그려져 있습니다. 시칠리아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아라비안 나이트의 환상적 세계를 오마주한 것으로 돈나푸가타의 예술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와인으로 꼽힙니다.
“Love. Of course, love. Flames for a year, ashes for thirty.”(사랑, 물론이지! 1년 동안은 불꽃과 열정, 30년은 재.) -소설 ‘표범’ 속 살리나 공작
![시칠리아 남쪽 판텔레리아(Pantelleria) 포도밭의 모습. [나라셀라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mk/20250628091211710rzjz.jpg)
돈나푸가타는 넷플릭스와 공식 협업을 통해 이번 드라마 방영을 기념하는 플래그십 와인 ‘밀레 에 우나 노떼 2021 빈티지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였습니다. 시칠리아의 심장부, ‘레오파드의 땅’에서 자란 시칠리아 토착 품종 포도인 네로 다볼라와 국제 품종인 시라, 프티 베르도 등으로 빚어진 이 한정판 와인은 시칠리아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변화와 전통이 교차하는 서사를 담아냅니다.
돈나푸가타의 오너이자 5대 양조자인 호세 랄로와 안토니오 랄로는 인터뷰에서 “와인은 문화를 담는 진정한 그릇”이라며, 이번 협업을 통해 시칠리아의 심장과 영혼, 그리고 이탈리아 문화유산의 깊이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드라마 ‘레오파드’가 스크린에서 시칠리아와 시대 변화를 그려냈다면, 돈나푸가타의 와인은 그 변화의 향과 맛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한 병에 담아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시칠리아의 영혼과 전설, 열정이 담긴 돈나푸가타의 미래를 기대해봅니다. Cin cin!(친친·이탈리아어로 친근하고 가벼운 건배,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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