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일본인 아이돌, 한류의 새로운 단면 [콘텐츠의 순간들]
일본은 케이팝과 긴밀한 사이다. 가장 가까운 타국이면서 세계 2위 규모의 음악시장이다. 그 때문에 기획사들이 각별히 공을 들이는 곳이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외교관계로 인해 역대 정부의 수교 방침에 따라 산업에 파장이 미친 적도 있다.
지난달엔 트와이스가 새 일본 앨범을 발표했고, 베이비몬스터는 아시아 투어에 돌입했다. 이달에는 르세라핌의 일본 활동과 아일릿의 한국 컴백이 예고됐다. 네 그룹은 데뷔 시기가 다르지만 모두 케이팝 신에서 각자의 자리를 얻어낸 인기 아이돌이다. 무엇보다 일본인 멤버가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는 점이 닮았다. 이제는 많은 그룹에 일본인 멤버가 있다. 언급한 그룹 외에도 아이브의 레이, 미야오의 안나 등이 있다. 특히 베이비몬스터는 YG엔터테인먼트 최초로 일본인 멤버를 발탁한 상징적 사례다.

10년 전만 해도 일본인 멤버는 낯선 존재였다. 케이팝에 중국인, 동남아시아 출신 아이돌은 있어도 일본인은 드물었다. 그들은 케이팝에 참여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현지에 찾아오는 케이팝 그룹의 활동을 즐기는 소비자였다. 기획사들 역시 2차 한류를 거치며 2010년대까지 일본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해서 굳이 현지 멤버를 발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수교가 악화되며 일본의 한류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2015년 데뷔한 트와이스는 대형 기획사에서 일본인 멤버를 다수 발탁하며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방안을 제시한 모델이다. 일본인 멤버 3인방 ‘미나, 사나, 모모(미사모)’를 내세워 좁아진 문을 다시 열었다. 일종의 현지화 전략의 변형이다. 외국인 멤버로만 결성된 100% 현지화 그룹은 아니지만, 일반적 그룹 구성에서 현지인 멤버의 비중을 높이며 시장 친화력을 확보했다.
트와이스는 문화의 교류를 넘어 문화의 정서적 스밈을 일으켰다. 미사모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일본 여성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아이콘이 됐다. 나아가서 이런 동질감은 트와이스가 현지 대중 여론과 미디어에 더 수월히 수용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었다. 한국에서도 이전까지 생소했던 일본인 아이돌이 활약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었다. 미사모는 케이팝 시스템 안에서 아이돌로 양성됐고 특히 사나의 한국어는 데뷔할 때부터 한국인처럼 유창했다. 그들은 한국 팬들에게 우리의 산업이 낳은 새로운 타입의 아이돌로 여겨졌다. 트와이스는 한·일 양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케이팝 걸그룹 최초로 한국과 일본 음반 판매량 총합 2000만 장을 돌파했다. 미사모는 일본인 케이팝 아이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됐다. 많은 기획사가 트와이스 모델을 참조해왔다.
몇 년 뒤, 2018년에는 미야와키 사쿠라가 한국에 왔다. 사쿠라는 이미 일본 아이돌 그룹 HKT 48로 활동하고 있었고, 한·일 합작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즈원 멤버로 데뷔했다. 사쿠라는 케이팝 신으로 이적하며 일본의 아이돌 시스템이 한국 아이돌 시스템과 접속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그가 대표하는 것은 단순한 국적을 넘어 제이팝 아이돌의 한 단면이었다. 한국에서도 뛰어난 팬 응대 능력과 노련한 무대 매너로 인기를 얻으며 양국 아이돌의 차이점은 물론 공통점도 보여주었다. 아이즈원 해체 후에는 르세라핌으로 다시금 데뷔해 활동하고 있다. 해외 문화산업에 속한 외부인이 일정한 단계를 거치며 케이팝에 완전히 정착한 진귀한 사례다.
사쿠라는 미사모와 달리 일본 연예계에서 성장했기에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좀 더 분명히 상징한다. 일본에서는 문화산업 분야의 해외 리그로 진출한 대표선수 같은 이미지가 있다. 일본 내 유명인의 인지도를 조사하는 닛케이 파워 랭킹에서 높은 순위에 오를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있다. 미사모와 사쿠라 이후 케이팝 신에서 일본인 아이돌은 많이 늘어났고, 다국적 오디션 프로젝트도 이어지고 있다. 걸그룹뿐 아니라 보이그룹도 마찬가지다.
미사모와 사쿠라에겐 이처럼 일본이라는 국가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케이팝 신의 일본인 아이돌 계보를 쓰기 시작한 주인공으로서, 한·일 양국의 문화를 잇는 접점이자 한국 미디어에서 일본을 나타내는 상징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일본인 멤버는 더 이상 희귀하지 않게 됐고, 뒤이어 데뷔한 이들은 국적만으로 존재감을 얻기는 힘들어졌다.
댄스 뛰어난 이로하, 화려한 랩의 아사
신인 그룹에 속하는 아일릿과 베이비몬스터의 일본인 멤버들은 선배들과 다른 모습으로 정체성을 얻고 있다. 일본이라는 명찰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 뛰어난 퍼포먼스 능력으로 주목을 받곤 한다. 아일릿의 이로하는 팀 내에서 가장 댄스가 뛰어난 멤버이며, 베이비몬스터의 아사는 화려하게 랩을 뱉는 라이브 영상이 한·일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전에 데뷔한 일본인 아이돌도 실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모모는 트와이스의 메인 댄서다. 다만 최근의 일본인 멤버들은 아이돌로서 일반적 역량이 더 강조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제 특정한 국적의 상징에서 케이팝이라는 정체성에 훨씬 동화된 상태다. 사쿠라와 미사모가 닦은 길 위에서, 새로운 일본인 아이돌은 이전보다 폭넓은 정체성으로 성장하고 있다. 케이팝의 세계화와 몇 차례 한류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에서 케이팝이 외래문화를 넘어 일상화된 문화로 자리 잡은 것과 나란한 현상이다.

이런 변화는 케이팝이 외부 요인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생적 기반을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앞서 얘기했듯이 케이팝 산업은 늘 외교적 파장에 촉각을 세워야 했다. 잠재적 위기는 일본인 멤버들이 한국 활동을 하다가 반일 여론 논란을 겪는 것으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케이팝 시장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2019년에 한·일 무역분쟁이 벌어졌지만, 팬데믹이 끝난 2023년 일본 내 케이팝 공연 관객 수는 5년 만에 두 배가량 증가했다.
케이팝은 일본에서 안정적으로 시장을 점유하고 있으며, 정치적 풍랑에 휩쓸리지 않는 자율적 공간을 확보했다. 케이팝은 일본에서 현지화된 활동을 하고, 일본인 멤버를 받아들이며, 현지화 그룹을 제작하는 등 기획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실행했다. 가까운 음악시장으로 더 깊숙이 진출하려고 시도한 한편, 일본인을 케이팝의 구성원으로 끌어들이며 문화적 팽창을 꾀한 것이다.
사쿠라와 미사모는 그 첫 파도를 타고 왔다. 그들은 환영받는 한편 때로는 사건을 겪으며 한국 문화계 내부에 ‘일본’과 접촉하는 일상적 창구를 만들었다. 케이팝 신의 일본 시장 진출은 단지 외부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이라는 타국을 받아들이는 한국 문화의 내적 변화이기도 했다. 그것은 케이팝이 만들어낸 조용하고 의미 있는 문화적 전환의 장면 중 하나일지 모른다.
대선이 치러졌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향후 한·일 관계는 이전과 달라진 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케이팝 안의 일본인 아이돌’이 세운 다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지나온 궤적은 양국 시민들의 열광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윤광은 (문화평론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