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플래툰 속에서 평화의 다실을 꿈꾸다
![왼쪽부터 티벳 10대 판첸라마가 반선긴차를 들고 있는 모습, 영화 플래툰의 주인공 크리스 테일러, MLB 김혜성(키움 소속 시절)과 크리스 테일러 선수, 티벳 반선긴차. [사진=유영현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28/KorMedi/20250628070227030cwqu.jpg)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 김혜성 선수는 명문구단 LA다저스에서 오랫동안 내·외야를 오가며 감초처럼 활약하였던 크리스 테일러를 밀어내고 멀티플레이어 자리 하나를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김혜성은 플래툰 시스템(platoon system)에 갇혀 지금도 선발 출장의 기회를 제한적으로 얻고 있을 뿐이다.
플래툰은 군대에서 상황에 따라 교대하거나 역할을 분담하여 움직이는 30~50명 정도의 작은 전투 단위 소대(小隊)를 뜻한다. 이 개념이 야구에 차용되어 선수들을 특정 상황에 따라 교대로 기용하는 전략을 뜻하게 되었다.
플래툰 시스템은 타자의 좌우 유형과 투수의 좌우 유형에 따라 선수를 구성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1940년대 미국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 감독 케이시 스텡겔(Charles Dillon "Casey" Stengel)이 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지금도 플래툰 시스템을 신념처럼 굳게 지키는 지도자들이 많다. LA다저스 로버츠 감독은, 상대 선발투수로 좌투수가 예고되면 전날 맹타를 휘둘렀다 하여도 김하성을 벤치에 앉히고 다른 우타자를 선발 출장시킨다.
플래툰 시스템은 공격의 효율을 위한 시스템이지만, 적응 기회를 제한하여 선수의 성장을 막는다. 경력 평가에서도 선수에게 불리한 시스템이다. 해당 선수에게는 실질적인 주전이 아니라는 의식과 한정된 상황에서만 존중된다는 자괴감을 주는 등 부작용이 많다.
'플래툰'이라는 이름의 감옥
올리버 스톤 감독은 1986년에 《플래툰》이라는 전쟁 영화를 내놓았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도덕성과 생존 본능,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밀도 높게 그려낸 명화이다.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였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 올리브 스톤은 영화 제목으로 전쟁의 배경이 되는 큰 무대인 '베트남 전장' 대신 작은 무대인 '플래툰'을 붙였다. 그는 국가 간 전쟁이라는 거대한 갈등과 비극을 국가라는 큰 조직이 아닌 '소대'라는 작고 밀접한 전쟁 단위로 축소, 현미경을 들이대어 관찰하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상류층 대학생 출신인 크리스 테일러이다. 공교롭게도 김혜성에 의해 LA다저스에서 밀려나 트레이드된 선수와 이름이 같다. 그가 '소대'에서 마주한 것은 적보다도 더 끔찍한 아군 내의 분열과 폭력이었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소대원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대응하며 서로 충돌한다. 엘리어스와 바네스 반장은 특히 극하게 대립하였다. 엘리어스는 인간의 존엄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 하여 민간인 학살이나 고문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자인 반면, 바네스는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주인공 크리스 테일러는 엘리어스와 바네스 사이에서 흔들리며 고뇌한다.
주인공 크리스 테일러는 전장에서의 모든 경험을 견디며 끝내 살아남는다. 그는 영화 말미에 엘리어스와 바네스 모두 자신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싸운 두 존재라고 독백한다. 영화에서 테일러는 바네스를 처형하고 자신 내부의 바네스와 결별하였음에도 바네스가 부인할 수 없는 그의 일부임을 시인한다. 그는 자신이 "엘리어스와 바네스라는 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와 같다"고 고백한다.
두 아버지, 하나의 영혼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신은 찰나의 경험을 간직하고 남은 인생 속에서 선함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독백으로 전장에서의 '그 순간'을 절대적으로 맞이하고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리스 테일러에게서 나는 '일회일기(一會一期)'의 차(茶) 정신을 발견한다. "한 번의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뿐일 수 있다"는 일본 다도(茶道)의 핵심 철학이다. 이 한 잔의 차는 다시는 동일한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오늘의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절대적인 찰나의 인식이 인간 내면에 겸허함을 낳고,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 만든다.
사무라이는 본래 전투와 명예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던 전사 계급이다. 이들의 삶은 항상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도는 전투와는 정반대의 행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다도는 사무라이 문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정신 수양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사무라이에게 있어서 다도는 단지 차를 마시는 예절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임하는 자가 삶의 한순간을 어떻게 존엄하게 맞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훈련이었다.
일회일기는 사무라이 다도의 핵심 철학을 이룬다. 이 만남이 생애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전제는, 사무라이가 목숨을 걸고 임하던 결투의 순간과 같은 긴장감을 다도 안에서 다시 체험하게 만든다.
사무라이 삶을 지배한 '일회일기' 철학
칼을 벗고 다실(茶室)에 들어서는 순간 전사로서의 자아를 내려놓고, 존재 자체로 상대를 마주하는 법을 배운다. 찰나를 전력으로 살아내는 의식, 그것이 바로 일본 다도의 본질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사무라이들이 차를 마시는 다실은 단위 공동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소대'와 같다. 그러나 '소대'와 '다실'은 인간 존재의 양극단을 대비시켜 준다.
'소대'는 전쟁 속에서 강제된 공동체의 단위이다. 전투를 위한 조직으로, 외적 명령과 규율에 따라 구성된다. 생존을 위한 상시적 긴장과 적응이 요구되며 내부 갈등이 언제든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는 공간이다. 《플래툰》에서 인간의 본성은 '소대'라는 무대 속에서 긴장과 불안으로 파괴된다.
반면, '다실'은 평화를 위한 공간이며, 자발적 참여와 예법에 기반한 공동체이다. 침묵하고 공감하며, 감정의 정화와 존재의 회복을 지향하는 곳이다. 사무라이들은 칼을 내려놓고 다실에 들어간다. 다실에서는 차분한 의례 속에서 관계를 재구성하고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는 경험이 가능하다.
사무라이들이 일회일기 철학에 심취했던 이유는 죽음을 항상 눈앞에 두었던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의 무게' 때문이다. '소대'와 다실에서의 시간은 같은 순간이지만 방향성과 맥락은 전혀 다르다. 전쟁터에서 순간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다실에서는 그 순간이 오히려 삶을 치유하고 복원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소대'는 갈등의 미시적 장치이고, 다실은 조화의 실험실이다.
김혜성-크리스 테일러-플래툰-일회일기-다실로 생각이 이어지면서, 내 손은 10년 전 사들인 '반선긴차'에 닿았다. 10대 판첸라마가 1986년 사비를 들여 자국민을 위해 만든 보이생차는 판첸의 음역인 반선(班禪)과 버섯(심장)처럼 꼬인 차라는 뜻의 긴차(緊茶)를 붙여 반선긴차라 불렀다.
반선긴차는 판첸라마의 마음이 담긴 차로 티벳인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지금까지도 심장 혹은 버섯 모양의 차는 꾸준히 반선긴차라 불리며 생산된다.
차 한 잔에 담긴 삶과 죽음의 무게
내 반선긴차에는 '일기일회'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순서가 뒤집혔지만, 일회일기와 뜻이 같다. 지난 10년 동안 갖지 못하였던 질문이 생겨났다. 2015년에 출시된 이 반선긴차에 차 제작자는 왜 일기일회라는 별명을 붙였을까?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달라이라마의 독립운동 이후 베이징에 억류되었던 10대 판첸라마는 1962년 24세의 나이에 마오쩌둥의 티벳 정책에 항의하는 70,000자 청원서를 올렸다. 티벳 백성을 위해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라 여기고 목숨을 걸고 간언하였다.
그의 청원을 마오쩌둥은 '독화살'로 여겼다. 판첸라마는 14년간 투옥 혹은 연금 상태로 지낸다. 복권이 되자 그는 티벳을 순례하며 수천 개의 작은 마을을 일일이 방문하며 그의 백성들과 일생일대의 만남을 이어갔다.
모든 만남을 인연으로 여기며 전심을 다한 그의 순례는 일회일기 철학의 실천이었다. 판첸라마에게서 일회일기의 정신을 발견한 차 제작자는 그가 출시하는 반선긴차에 일기일회 별명을 붙여 생산하였을 것이다.
현재에도 우리들은 플래툰 속에서 살아간다. 회사의 부서, 가정, 여러 조직, 동호회, 병동, 학급 등이 현대의 플래툰이다. 플래툰은 인간 조건의 극단을 보여주는 갈등의 공간이다. 전장과 같이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갈등은 미세하여 오히려 더 복잡하다. 플래툰 속에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일회일기이다.
반선긴차에 손이 이르렀으니, 오늘은 내가 평소 외면하는 다도를 진지하게 수행해 본다. 플래툰 속에 가상의 다실을 짓는다. 오늘의 차는 반선긴차.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과 타인을 귀히 여기는 태도로 찻자리에 임한다. 존재의 수용과 회복이라는 최상의 가치에 이를 수 있을지 기대하며 차를 마신다.
유영현 원장(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유영현 원장 (yhyoo@d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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