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너머 시대를 보다

서정민 2025. 6. 28. 00: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검정 코트 22벌의 81일간 선블리치 변화를 전시한 지용킴의 ‘흔적들(Traces)’. [사진 일민미술관]
“패션은 동시대를 가장 예민하게 기록하는 매체다.” 7월 20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ts’ 전시의 출발점이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유행’을 창조해온 패션을 동시대의 시각 문화를 담는 미술의 영역으로 바라보자는 시도다. 전시는 이를 위해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 개의 패션 브랜드 지용킴, 포스트아카이브팩션(Post Archive Faction·파프), 혜인서(HYEIN SEO)가 패션을 다루는 각기 다른 방식에 주목했다.

제1 전시실에선 지용킴의 선블리치(Sun-Bleach) 기반 작업들을 볼 수 있다. 일본 문화복장학원에서 수학 후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학사·석사과정을 마친 김지용은 세인트 마틴 졸업 작품 전부를 런던의 유명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이 구매하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패션 브랜드 르메르·루이 비통에서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일했고, 삼성물산이 매년 진행하는 SFDF(Samsung Fashion & Design Fund)를 2024년·2025년 연속 수상했다.

김지용이 자신만의 고유한 패션 언어로 사용하는 ‘선블리치’란 태양·바람·비와 같은 환경요소를 이용해 원단의 색을 풍화시키거나 바래게 해서 옷을 디자인하는 기법이다. 옷감의 일부를 묶어서 염색약에 담그면 그 부분은 물감이 배어들지 못해 전혀 다른 색깔과 문양이 나타나는 ‘홀치기염색’과 비슷한데, 김지용의 도구는 자연이다.

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흔적들’은 이 작업을 가장 확실히 보여준다. 반원형 목재 구조물에 22개의 검정 코트가 걸려 있는데 하단에는 각각 다른 숫자가 쓰여 있다. 3일차부터 80일차까지 선블리칭 작업 기간을 적은 것이다. 실제로 원단의 빛바랜 흔적이 조금씩 다르다. 패션 산업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화학 염색 사용, 대량 생산 과정 등을 배제하고 자연과 시간이라는 도구만으로 더디지만 끈기 있게 자신만의 옷을 만들어가는 디자이너의 기록이다.

파프의 ‘아카이브 무지개’. [사진 일민미술관]
제2전시실은 파프가 꾸몄다. 바닥에는 옷을 만들기 위한 기본 단위인 패턴이 잔뜩 깔려 있고, 한쪽 벽에는 이 평면의 패턴이 입체로 완성된 실제 옷들이 걸려 있다. 중앙에는 12대의 모니터로 구성한 반원형의 ‘아카이브 무지개’가 있다. 각각의 모니터에선 지금껏 파프가 해온 여러 프로젝트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흘러나온다. 패션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과거-현재-미래, 디지털과 아날로그, 데이터와 기억, 결과와 과정이 혼재한 ‘아카이브의 바다’를 표현한 것이다. 옷들을 휘어지는 장대에 건 이유도 자신들만의 바다에서 낚아 올린 결과물이라는 은유다.

하얀 벽에는 1만 명의 이름이 채워져 있는데, 지금까지 파프를 지지해준 소비자와 후원자들의 명단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정성’이다. 나무판에 음각으로 이름을 새기고, 판 전체를 흰색으로 칠한 뒤, 이름 한 자 한 자를 연필로 다시 썼다. 종이 위에 프린트한 이름처럼 가시적이진 않지만, 이름마다 연필이 지나간 흔적이 제각각 다르게 묻은 모습이 감동적이다.

홍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임동준과 건국대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디자이너 정수교가 2018년 설립한 파프는 컬렉션을 3가지 분류로 구성하는 점도 독특하다. 실험적인 의상을 선보이는 ‘레프트’, 일상복을 선보이는 ‘라이트’, 그 사이의 형태인 ‘센터’다. 그 면면을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혜인과 이진호가 2014년 벨기에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 재학 중 만든 패션 스튜디오 혜인서는 뉴욕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2018년 서울로 주거지를 옮겼다. 브랜드 창립 10주년을 맞은 만큼 이번 전시에 참가한 브랜드 중 가장 아카이브가 많은데, 디자이너가 최종 결과물인 컬렉션을 만들어내기까지 과정 자체가 꽤 복합적이라 더욱 그렇다.

혜인서의 ‘프로세스 보드(Process Board)’. [사진 일민미술관]
서혜인은 소설이나 영화 속 한 장면, 인문서나 그림책의 한 부분에서 영감을 얻고 관련 이미지와 자료들을 화이트보드에 모두 붙여 놓은 뒤 천천히 자신의 생각과 함께 컬렉션의 서사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거나 표현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해당 분야의 전문 아티스트를 찾아 협업을 제안하기도 한다. 때문에 제3전시실 중앙에 설치된 ‘프로세스 보드’는 미술관의 개방형 수장고처럼 스케치, 드로잉, 참고 자료와 이미지 등 아이디어의 편린들이 가득하다. 화이트보드에 붙은 물건과 이미지들의 서사가 궁금하다면, 밑에 붙은 숫자를 확인하고 벽에 가서 해당 번호를 찾으면 자세한 설명을 읽을 수 있다.

국내외에서 주목 받고 있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는 작지만 알차고 또 새롭다. 특히 이지언 큐레이터의 마지막 제안이 흥미롭다. “이번 전시의 네 번째 참가 디자이너는 관객이에요. 요즘 가장 잘 하고 있는 패션 브랜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입은 옷이 동시대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되는 거죠.”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