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꼬마동반자 여권의 문화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작가정신
장마가 그치면 여행의 계절이다. 길 떠날 때 잊어선 안 될 꼬마 동반자가 여권이다. 국경을 넘고 경계를 가로질러 낯선 땅으로 들어갈 때 나를 증명해줄 소중한 ‘여행 면허’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 교수인 지은이는 여권은 ‘나’와 ‘문화’, 그리고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라고 말한다. 여권에는 자아의 발견, 서로 다른 집단 간의 문화접변, 국경이라는 이름의 장벽 세우기 등 인류사의 행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혁명 와중에 조국을 떠난 마르크 샤갈,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간 한나 아렌트는 여권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국경이 국가의 상징이 된 시대, 여권은 떠나야 생존할 수 있는 사람에겐 구명줄이다.
1921년 북극 탐험가 출신의 인도주의자 프리드쇼프 난센은 러시아 혁명과 전쟁 등으로 피신해야 할 수많은 사람을 도와줄 초국가적 여권을 제안했다. ‘난센 여권’으로 불리는 이 증명서는 수많은 무국적자·추방자·난민에게 구명줄 역할을 했다. 그 공로는 1922년 노벨상으로 돌아왔다.
여권의 기원 중 하나가 군주나 권력자가 제공한 안전통행증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의 대칸이 하사한 패자(牌子) 덕분에 안전과 통행 편의를 제공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통행증은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서양에서 주권과 국경의 개념이 싹튼 계기도 됐다.
영국을 번영시킨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국가적 필요에 의해서만 발급하던 통행허가서의 발행 범위를 문화적·교육적 견문을 넓히려고 유럽 대륙으로 떠나는 사람까지 확대했다. 장기간의 문화탐방인 그랜드투어의 시발점의 하나다. 이처럼 여권의 확대 발급은 글로벌 시대를 여는 첨병 역할을 했다.
1976년 9월 26일 이집트 카이로를 출발해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승객은 프랑스 국무장관의 의전과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 승객은 이집트 박물관에 있던 고대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였다. 인류학 박물관 무균실에서 손상을 늦출 처치를 받기 위해 프랑스를 찾은 고대 통치자는 놀랍게도 사망한 지 3000년 뒤인 그해 발급받은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유해 운송에는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설, 이집트나 프랑스의 법률 때문이라는 설, 해외에서도 보호받기 위해서라는 걸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된다. 분명한 건 여권이 그런 다양한 이유에서 우리 앞에 오게 됐다는 사실이다.
여권은 문학과 영화에서 긴장감을 고조하는 도구로 종종 등장한다. 벤 애플렉 감독·주연의 영화 ‘아르고’에선 가짜 캐나다 여권이 주연급으로 나온다. 이란에서 1979~81년 벌어진 미국인 인질사건 당시 일부를 캐나다인으로 위장해 탈출시키는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여권이 가짜임을 뒤늦게 깨달은 출입국 직원과 테헤란 북쪽의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활주로에서 지상 주행 중인 여객기가 대조를 이루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처럼 여권은 수많은 콘텐트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설레임의 동반자이기도 하고. 원제 ‘License to Travel: A Cultural History of the Passport’.
채인택 서평 저널리스트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