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정치의 영역, 인문학의 영역

2025. 6. 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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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한번 읽고 난 후 온전히 나를 장악했던 시,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다. 궁금하다. 시인은 그를 보리밭에 묻으면서 그 사람의 가난까지 묻어버리려 했던 것일까, 혹 그는 보리밭의 힘, 밥의 힘으로 명복을 빌며 그 사람의 가난까지 그리워한 것은 아닐까.

「 현대 사회서 크게 발전하는 AI
AI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까
삶은 누구에게나 미궁 같은 것
자기 방식으로 제 길 찾아가야

나는 또 궁금하다. 왜 요즘 가난엔 그런 깊이 혹은 낭만이 없는 지. 바다가 있고, 산이 있고, 가족의 정이 있고, 햇살 아래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있을 때 가난은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을 일깨우는 스승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안락함에 빠져들지 않게 하는 죽비 같은 것! 그때 밥을 먹는 일은 대지의 숨결을 느끼는 일이고, 햇살과 바람을 삼키는 일이다. 그러면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겠다. 밥이 하늘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도시의 세상은 집세, 대출금 상환, 교육비, 식비, 핸드폰비, 병원비, 돌봄비 등 모두가 돈에 기댄다. 돈 없이 살 수 없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종종 무능과 실패 혹은 혐오의 낙인이 따라다니는 생존의 문제이고, 공적으로 다루어야 할 사회적인 문제다. 아테네의 민주정치의 아이콘 페리클레스는 일찍이 그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는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가난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확실히 페리클레스는 정치인이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되 사치에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지만 유약하지는 않은 아테네를 꿈꿨던 그는 분명히 아테네 직접 민주정치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도편추방제에 의해 두 번이나 추방을 당했으니 누구보다도 민심의 힘을 알지 않았을까.

쉴 틈도 없이 일을 할 것 같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이재명 대통령의 먹사니즘은 페리클레스의 철학을 닮았다. 그런 그답게 그가 제일 먼저 찾은 산업체는 AI 데이터 센터였다. 현대사회에서는 AI의 경쟁력을 무시한 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는 없겠다. 시대의 방향을 읽을 줄도 알고, 의지도 있고, 힘도 있으니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그동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초가속 시대를 경험하게 될 것 같다.

그런 시대에 도대체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미국 대학을 보낸 한 친구가 미국 대학의 분위기를 전하며 내게 이런 얘기를 한다. “인문학의 위기래. 벌써 챗GPT가 리포트도, 논문도, 글도 다 써주는 세상이라는 거야. 주제만 넣으면 자료정리를 다 해주니….”

그것이 강단 인문학자의 위기일 수 있지만 인문학의 위기가 될까? 아니, 인문학이 위기였던 적이 있을까, 기회였던 적이 없는데. 인문학은 자료 정리를 잘해서 좋은 평가를 받게 하는 도구가 아니다. 몇 년 전에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반복적으로 나와 김희성의 성격을 보여준 명제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들을 좋아하오.” 인문학이 좋은 사람들은 쓸모에 끌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끌리는 것과 놀 줄 아는 사람들이다.

분명 챗GPT의 시대가 열렸다. 『로봇종 인간, 자연종 인간』을 쓴 정대현 교수는 “자신보다 기능적으로 뛰어난 로봇과 살지 못할 까닭이 없다”라고까지 이야기한다. 혹자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잘 물어야 한다며 마치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이 인문학적인 능력인 양 말하기도 한다. 구차하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종종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들을 검열한다.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묻고 싶은 것을 묻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는 거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진정한 물음엔 답이 없다는 것을. 단지 물음을 품고, 앓고, 물음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대다 엿보게 되는 것이 삶의 진실이라는 것을.

융은 그것을 개성화 과정이라고 했다. 그 개성화 과정을 정말 혹독하게 거쳤던 철학자가 니체다. 그 니체가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던진 물음은 이것이었다. 어찌하여 나는 하나의 운명인가. 그 니체를 사랑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니체 인생을 이렇게 해석한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오 위대한 순교자여, 그대의 거룩하고 비극적인 삶이었다. 질병은 그대의 위대한 적이며 또한 가장 위대한 친구이고, 죽을 때까지 그대에게 변함없이 충실했던 유일자였다. 그것은 절대로 그대가 마음을 놓거나, 제자리에 머물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대는 불꽃이어서 활활 타오르다 잿더미만 남기며 떠났다.”

삶은 누구에게나 미궁이다. 그를 그답게 만든 미궁에 대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그에 대한 호기심이라기보다 그것이 ‘나’를 자극하여 미궁을 빠져나갈 아리아드네의 실이 내 안에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많이 배웠거나 아니거나, 병들었거나 건강하거나, 운이 좋거나 불운하거나, 성격이 좋거나 모나거나, 저마다 자기 미궁을 살고, 거기서 자기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다. 미궁 같은 인생이 당신에게 던지게 해준 물음은 무엇인가.

이주향 수원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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