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러] ‘강화길 유니버스’의 가상 도시 ‘안진’
문학의 장(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무심코 놓치고 지나간 신간, 인터뷰에 담지 않은 후일담, 각종 취재기 등 이모저모. +α를 곁들여 봅니다.

얼마 전 장편소설 ‘치유의 빛’을 낸 소설가 강화길(39)을 서울 연희동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 기사는 지면(6월 19일 자 A18면 <박완서 키드…“내 소설은 한국형 고딕 스릴러”>)에 실었으나, 못다 한 말이 있어서요. 바로 강화길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방의 가상 소도시 ‘안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태초엔 ‘니꼴라 유치원’이 있었다. 2016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은 ‘니꼴라 유치원’이 안진의 시작이었다고 해요. 첫 단편집 ‘괜찮은 사람’의 문을 여는 ‘호수’, 장편소설 ‘다른 사람’ 등. 강화길 작품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안진에 놓여 있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치유의 빛’에서도 화자의 고향은 안진시 영직동입니다. 어느덧 ‘강화길 유니버스’의 상징 같은 공간이 된 듯한데요. 안진의 창조주와 ‘안진 토크’를 나눠봤습니다.
황지윤 기자(이하 황): 작품 초기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안진이라는 공간이 등장하잖아요. 어떤 의미인가요?
강화길 소설가(이하 강): 사실 처음에 안진이라는 공간을 첫 단편집에서 썼을 때는 이렇게 오래 쓸 계획이 아니었어요. ‘니꼴라 유치원’이 시작이에요. 그때는 공간이 하나 필요했거든요. 어떤 기괴한 유치원이 있는 지역 도시. 그런 설정으로 만들었는데, 쓰고 나서 보니까 이 공간이 좀 아쉽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공간 안에 유치원만 있는 건 아닐 테고, 이런저런 다른 공간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호수라던가.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을 텐데 적극적으로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공간을 나만의 시그니처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서 계속 작업해볼 수 있지 않을까? 10년 가까이 이 공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요. 처음엔 어두컴컴하고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저도 잘 몰랐는데요. 하나씩 알아가면서 (안진이) 환해지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황: 안진이라는 지명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강: 일단 한국엔 없는 지명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일부러 처음엔 한자도 정하지 않았던 게, 한자를 정하면 뜻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정하지 않고 있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안진은 서울이기도 해요. 지역 도시이기도 하고요. 저는 20대 중반까지는 지방(강화길은 전북 전주 출신이다)에서 살았고, 그 이후에 서울에 올라와서 지금까지 쭉 살고 있는데요.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했어요. 이사를 하면서 매번 느끼는 감정들이 있었어요. 정을 붙이려 하면 이사를 하고, 친구를 좀 사귀면 이사를 하고…. 전주에서 안정적으로 살다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오고 나서, 서울에서도 주거 환경이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학교 기숙사에 살다가, 연희문학창작촌에서도 지냈는데 제 주거 공간은 아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사는 공간, 거주지 이런 것에 예민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안진을 만들면서 내가 거쳐온 어떤 도시, 동네, 학교 기숙사 등 그런 느낌이 모였어요. 작은 지점토를 뭉쳐서 덩어리 하나를 만든 것처럼. 공간에 대해 제가 느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오브제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모습인 거죠.
황: 한자는 굳이 정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저 말고도 편안 안(安)이 아닐까 추측을 많이 하는데요. 또 ‘안진’ 하면 ‘안전’이 떠오르고, 아이러니가 담긴 재미있는 말놀이 같기도 해요.
강: 저도 그 해석을 좋아해요. 편안한 지역이다. 그런데 전혀 편안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그런 독해를 저도 좋아하죠.
황: 어느 작품에선가 전북 어느 소도시라고 구체화한 적도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도시든 안진이 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작가님 머릿속에 구체적인 가상 도시가 있는 형태인가요?
강: 처음에는 전자였던 것 같아요. 내가 거쳐 간 모든 공간이 안진이라는 성격을 지닐 수 있지,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그런데 요즘은 하나하나 구체화되어서 저한테도 안진이라는 공간이 구체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안진에 있는 어떤 화자, 안진에 속해 있는 나, 그녀, 이런 사람들 이야기였다면 요즘은 이 사람들도 안진을 보는 거죠.
황: 점점 더 구체적인 덩어리가 되는 거네요.
강: 어렸을 때 동네에서 놀잖아요. 그러다 좀 나이 먹으면 좀 더 멀리 나가보는 것처럼. 저도, 제 화자들도 안진을 멀리멀리 가보게 된 것 같아요.
황: 안진, 생각보다 큰 도시였군요.
강: 그러게요. 설정을 바꿔야 되나(웃음).
황: 작품에서 ‘지방성’이라는 것도 중요한 화두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가요?
강: 중요하죠. 왜냐하면 제가 지방에서 20대 중반까지 자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방 사람으로서 정체성이 강한 상태에서 서울에 올라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방과 서울의 낙차를 크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느꼈는데, 언젠가 내가 소설을 쓴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내가 발을 내린 어떤 지역에 대해서 잘 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황: 낙차라는 건….
강: 경제적인 거, 계급적인 거, 그런 것들이 되게 컸죠.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 놀란 건 밥값이었고, 반찬이 이만큼밖에 안 나오나…. 학교 앞 음식점이 이렇게 비싸다고?
이날 인터뷰는 서울 연희동 일대에서 진행했습니다. ‘의미 있는 장소를 골라달라’고 요청하자 작가가 직접 고른 동네입니다. 서울에 상경하고 학교 기숙사를 떠나 처음 정착한 곳. 그는 약 2년간 연희동에서 머물며 첫 단편집 ‘괜찮은 사람’과 첫 장편 ‘다른 사람’을 썼다고 해요.

황: 앞으로도 안진이 등장할까요?
강: 확신 안 하려고요. 예전엔 ‘그때만 쓰고 말겠지’ 이랬는데, 계속 쓰고 있고…. 쓰는 건 모르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여전히 그 도시가 아쉽고, 그립고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좀 더 가보고 싶지 않을까?
황: 같은 공간이 나오듯, 같은 인물도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어떤 요소만 공유하는 걸까?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OOO과 ‘치유의 빛’의 OOO.
강: 독자 분들이 알아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는 게 있는 것 같고요. OOO은 기자님이 처음 말씀해주셨어요.
황: 오, 이거 스포하면 안 되겠다.
강: 같은 이름을 반복해서 쓰는 게 안진하고 좀 비슷한 맥락인 거 같아요. 어떤 인물을 한 번 그렸는데, 이 인물이 가진 성향이나 성격 같은 게 있잖아요. 단편에서 30% 정도 드러냈다 하면 저한테는 아직 70%가 남아있잖아요. 이건 어차피 이 친구의 성향이니까, 마치 배우가 연기하듯이, 이 친구의 이름은 그대로 써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일종의 유니버스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그런 걸 추구하는 것 같긴 해요.
황: 기존 스토리와 어긋남이 없는지도 고려하나요?
강: 그건 별로 상관 안 해요. 오히려 어긋나버리고 독자들이 혼란스러워하면, 그 혼란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OOO 같은 경우도 완전히 다른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한때 어렸던 적이 있는 인물. 그 젊은 시절이 공명하면 어떨까, 하면서 착안한 것 같아요.
황: 인물이나 공간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 같아요.
강: 그런 거 같아요. 새로운 것도 좋은데, 저는 이제 좀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다 보면 오래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오래 봐야 한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반복해서 보고, 오래 보고, 그러다 보니 반복해서 쓰게 된 것 같아요.

황: 한 공간, 같은 인물이 반복적으로 나오면서 어떤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효과도 있는 것 같은데요. 특히나 안진은 첫 작품집부터 등장했기 때문에 초기작부터 일관된 세계관을 구축한 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세계관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나요?
강: 그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에는 잘 몰랐다고 했잖아요. 작가의 작업이라는 게 그냥 완성돼서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수십 년 혹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죠. 작가들 대부분이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잖아요. 그때까지 계속 완성해 나가는 것 같아요. 세계라는 것,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라는 직업은 그런 작업에 매료돼야 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도 가능하면 내가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쓰고 싶다는 게 사실은 그런 거죠. ‘내가 내 세계를 계속 완성해 나가고 싶다.’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 일부를 던진다.’ 그 말이 묘한 울림을 주었어요. 강화길이 완성해 나가는 세계가 어떨지, 그 와중 안진이라는 덩어리는 어떻게 더 구체화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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