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그분들이 나를

2025. 6. 2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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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도 저물고 있다.

여러 절차 끝에 2년 만에 오직 한국인을 위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을 열게 된 나는 고국 고향 음식들로 그분들의 마지막 인생을 따뜻하게 동행했다.

곧 내가 걸어갈 '노년'의 길을 그분들은 조용히 몸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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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도 저물고 있다. 풀들은 저마다 가장 부드러운 발뒤꿈치와 어깨를 가졌다. 그들의 어깨와 발뒤꿈치는 서로에게 낮춰주려 준비한 사랑이고 배려다.

오래전 미국에 이민 와 겪은 일들 중 하나가 떠오른다. 영주권 조건이던 1년 근무가 막 끝나갈 즈음 타국에서 모든 게 막막했다. 영어 실력도 늘릴 겸 집 근처 너싱홈(전문요양시설)에 취직한 것도 그 시기였다. 아침엔 학교 영어 수업, 오후엔 100베드 넘는 시설로 뛰었다. 돌봄 대상자로 누워 있는 한국인은 단 한 분뿐. 직원들은 그분과 소통이 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할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목 마른데…물도 못 마셔. 기저귀 갈아달라 영어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여든아홉, 할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푹 끓인 미역국도 먹고 싶고 시원한 물김치도…."

낯선 이국땅에서 내 인생을 바칠 천직을 찾은 것이었다. 여러 절차 끝에 2년 만에 오직 한국인을 위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을 열게 된 나는 고국 고향 음식들로 그분들의 마지막 인생을 따뜻하게 동행했다. 처음엔 '어르신'이라 부르다 '아무개 언니'라 했더니 모두 좋아하셨다.

"나 잠깐만 집에 갔다 올게요. 애들이 지금 배고프다고 난리여."

해가 기울면 ㅂ언니는 집에 가야 한다며 소지품을 싸고 안절부절못하셨다.

"문 좀 열어줘요. 애들이 배고프다잖아. 저 소리 안 들려? 얼른 밥만 한 솥 앉혀놓고 올게."

말리는 이들을 뿌리치고 소리 지르며, 어떤 때는 직원들을 때리기까지 하셨다. 다섯 아들 다 키워놓고도 과거에 갇혀 자식들이 운다는데 못 가게 하니, 울화가 치밀었을 터였다.

어느 아침, ㄴ언니는 틀니가 없다고 하셨다. 쓰레기통까지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식사 후 밥을 먹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웃으셨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더니. 틀니 내 입안에 잘 있네. 깔깔깔!"

다 함께 웃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의 틀니가 없어지면 '할머니 아~ 해보세요' 했다.

어느 날 ㅇ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쓰러지셨나? 화장실 문을 열자 기저귀 속 변을 손으로 퍼서 변기에 넣고 계셨다.

"ㅇ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이고, 별소릴 다 하네. 이걸 어떻게 당신한테 시켜, 내가 해."

문, 옷, 변기 모두 이미 엉망이었다. 간신히 할머니를 달래고 샤워를 시켜드렸다. 아기를 품던 가슴은 맥없이 늘어졌고, 엷은 머리숱은 초췌했다. 그분을 침대에 앉히고 물기를 닦아드리자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며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는 게 아닌가. "고맙수, 고마워…."

이 일들은, 인간에게 늙음이 무엇인지 내가 다시 생각하게 했고 두고두고 나를 단단히 키워주었다. 곧 내가 걸어갈 '노년'의 길을 그분들은 조용히 몸으로 가르쳐주고 떠나셨다.

'운다고 옛사랑이~'를 누구보다 곱게 부르던 ㅇ언니, 분홍을 좋아해 방 벽의 색까지 분홍이던 ㅁ언니, "거기 죽으면 내 많이많이 울어줄팅께 잉? 알았자?" 하며 내게 늘 이렇게 긴 고마움을 전하던 ㄱ언니,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내 꿈에 찾아와 인사하고 떠나던 ㅂ언니와 ㅇ언니. 그리고 언니, 언니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들 평안하시길.

[김인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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