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26 금강산: 우리나라에도 금강산이 있다
대웅전 등 아기자기한 산속 작은 사찰
시선을 사로잡는 ‘쌀바위’ 바라보며 진입
화암사~신선대 편도 2㎞ 당일 산행 적절
정상, 선계의 조망으로 등산객 마음 압도
설악산 울산바위·하얀 동해바다 펼쳐져
그리운 이와 함께 보고 싶은 황홀한 경치

말없이 깊은 풍경처럼, 있는 그대로 살아가길
창밖으로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떠올렸습니다. 내가 이 계절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요. 다시 돌아온 장마 앞에서 새삼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세차게 흘러갔습니다. 이전의 장마로부터 나는 얼마나 건너온 것일까. 지난 1년 사이 달라진 것이 있을까. 달라졌다면 그 변화는 성장일까, 퇴보일까…. 분명한 답은 알 수 없어도 구태여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이유만큼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어디에서 온 것이고 왜 온 것일까. 사실이 아닌 느낌 앞에서 새삼 궁금했습니다. 내가 제대로 잘살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싶다면 무엇을 해야 좋을까. 통장에 찍힌 수입을 비교해보면 될까. 업적과 성취의 목록을 작성해보면 될까. 내가 얼마나 많은 일에 연루되어 있는지, 그래서 나를 찾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보낼 시간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면 될까. 어떠한 방법도 마뜩잖아 이내 고개를 젓고 맙니다.

무엇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이러한 나날에는 산으로 갑니다. 산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이 답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지만 어떠한 연유로 나에게 다가온 그 느낌 안에 홀로 고요히 머물고 싶어서요. 서둘러 애써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머물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오래전에 산은 알려줬습니다. 그 경험과 기억을 믿고 나아가는 산. 모처럼 조금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이른 아침 속초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속초에는 누구나 잘 아는 한국의 명산 설악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속초 도심에 솟은, 해발 300m가 채 안 되는 청대산과 주봉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는 산은 이 모든 산 너머에 솟아 있습니다. 속초 북쪽의 고장, 바로 고성의 ‘금강산’입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묻습니다. 금강산은 북한에 있지 않냐고요. 우리나라에도 금강산이 있냐고요. 두 산은 다른 산이지만 고성의 금강산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자리한 해발 1638m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 중 첫 번째 봉우리로 볼 때 같은 산이기도 합니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고성으로 가는 3-1번 시내버스를 탑니다. 속초 시내에서 금강산 화암사까지는 10㎞ 남짓으로 가까워 택시를 타면 빨리 갈 수 있으나 버스를 타고 그 지역을 여행하는 재미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산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서두르지 않습니다. 3-1번 시내버스의 종점인 소노펠리체 델피노에 하차해 화암사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서울에서 온 어느 관광객의 차편 조수석을 얻어 타는 행운까지 따라줍니다.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걸어 화암사 경내에 도착합니다.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아기자기한 산속 작은 사찰입니다. 동종을 울리며 마음의 간절한 바람 한 가지를 읊조립니다. 화암사의 화자가 흔한 ‘꽃 화(花)’ 자가 아닌 ‘벼 화(禾)’ 자라는 점, 화암사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첫눈을 사로잡는 바위의 이름이 ‘쌀바위’라는 점은 이 절의 화두가 ‘풍요’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풍요, 평화, 행복. 나의 화두는 무엇이었나 한 번 더 돌아보며 정오경 금강산으로 들어섭니다.
화암사에서 금강산 신선대까지 편도로 2㎞, 왕복하면 4㎞ 정도 되니 당일치기 산행으로 아주 적절합니다. 다만 길 위에서 늦장을 부린 까닭에 오르는 내내 하산하는 등산객과 마주하는 수고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합니다. 무리 지어 내려오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 아직 가보지 않은 금강산의 풍경을 상상합니다. 감탄 일색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다들 무척 좋았나 봅니다. 산에 대한 기대 덕분인지 꽤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가는 데도 견딜만합니다.
곧 비가 오려는지 어느덧 세상이 어둑어둑해졌습니다. 온 사방에 구름이 가득 끼어 조금의 희망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습니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기다린 것은 바로 이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미리 확인한 일기 예보에 따르면 내일부터 이틀 동안 해가 뜬다고 합니다. 알고 있었으나 기어이 오늘 같은 궂은 날에 일부러 산에 온 이유는 그해의 장마는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해는 언제든지 다시 뜰 것입니다. 더운 날에든, 추운 날에든. 그러나 장마는 한 시절 지나가고 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선대 삼거리를 거쳐 금강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흔히 산정에서 볼 수 있는 정상석은 없으나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것입니다. 더 오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금강산 정상은 우리나라의 그 어떤 명산도 보여주지 않았던 선계의 조망으로 등산객의 마음을 압도합니다. 한쪽에는 설악산 울산바위가 병풍처럼 솟아 있고 반대쪽에는 구름을 안고 하얀 동해가 수평선을 지운 채 펼쳐져 있습니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왜 이제야 금강산에 왔을까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황홀한 경치에 취해 한참을 정상에 머물러 있던 중 빗방울이 떨어지는 통에 하산합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휴대 전화를 열어 그리운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같이 보고 싶은 풍경이 있으니 함께 오자고. 혹시 우리나라에도 금강산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냐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려 요란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금강산이 금강산인 것처럼, 높이나 크기를 내세우지 않고 유일한 풍경만으로 금강산이 금강산인 것처럼, 이번 여름에는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 한 번 존재해보려고 합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금강산 #정상 #화암사 #속초 #장보영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뇌물수수·청탁금지법 위반 혐의' 김진하 양양군수 1심서 징역 2년
- [속보] 이 대통령 “공정성 회복해 코스피 5000시대 열 것…경제·민생 회복 시급”
- ‘바다의 로또’ 참다랑어 최북단 고성서 무더기로 또 잡혀
- [속보] SC제일은행서 130억원 규모 금융사고 발생
- 경찰, ‘이준석 성상납 제공’ 주장 김성진 구치소 방문 조사
- 23년째 미제로 남은 ‘광치령 얼굴 없는 시신’ 방송 재조명 화제
- “45년 전 바다 속에 잠든 17명 승조원 흔적이라도 찾길”
- 40년 공직생활 삼척 공무원, 퇴직 앞두고 ‘그리움’ 을 기록하다
- 강원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춘천 홈경기 확정
- 꿈 속 노인 지시 따라 산에 갔더니 '산삼 11뿌리' 횡재… "심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