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일 "한일, 과거 제쳐두고 협력만 내세우면 신뢰 지속 어려워" [김회경의 질문]

1965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기본조약 체결 이후 60년간 한일관계는 많은 부침을 겪어 왔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2015년) 이후 문재인 정부의 합의 파기(2017년), 대법원의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2018년),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2019년) 등이 잇따르며 양국 관계는 '전후 최악'이란 평가와 함께 얼어붙었다. 2023년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한국 기업 기부금으로 강제동원 피해를 배상하는 '제3자 변제' 방안으로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 그러나 셔틀외교 복원 등의 성과에도 대국민 설득 없는 정부의 일방 추진, 일본의 상응 조치를 견인하지 못한 한계는 명확했다. 계엄과 탄핵 정국에 따른 한국의 정권 교체로 수교 60주년을 맞은 한일관계는 다시 한번 분기점에 섰다.
노무현 정부에서 주일 한국대사(2004년 3월~2007년 3월)로 재직한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는 "지금처럼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한일이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도 "협력에 앞서 일본이 과거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풀어가되, 미래지향적 협력을 추구하는 '투 트랙' 기조를 역설하면서 어느 한쪽만 강조해선 외교의 일관성과 균형을 잃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새 정부의 국익 중심 실용 외교와 관련해선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지난 정부가 소홀히 한 중국, 러시아와 관계 관리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라 석좌교수와의 인터뷰는 23일 서울 자택에서 진행됐다.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나.
"새 정부의 대일외교가 교류와 협력 중심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다만 협력을 진행하는 과정에 과거사 등 이해가 엇갈리는 문제가 언제든 돌출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지속가능한 한일관계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시바 총리를 포함한 전현직 총리 4명이 19일 주일 한국대사관 주최 한일 수교 60주년 행사에 참석한 것을 두고 관계 개선의 긍정 신호라는 해석도 있다.
"관계가 좋은 시절엔 전현직 총리 참석은 관례였다. 일본이 새 정부 외교에 대한 선험적 판단을 하고 있다기보다 겪어가며 판단하자는 입장일 것이다."
-역대 정부도 투 트랙 기조를 강조했지만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한일 모두 국내 정치 문제를 외교와 결부시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문재인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폐기를 꺼낸 게 대표적이다. 대일 강경책으로 국내 지지를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국익에 반하는 조치를 한 셈이다."
-나가시마 아키히사 일본 총리 보좌관이 최근 방한해 역사 문제에 대한 3대 원칙(단기적 이익에 얽매이지 말 것, 과거 합의 최대한 존중, 양국 국민 설득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과거사에 집착하지 말자는 뜻이다. 맞는 말이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부국강병 정책 등 과거 잘못에 대한 인정이 우선돼야 한다. 과거는 제쳐두고 현실적 필요에 따른 미래 협력만 강조하는 일본 태도로는 한국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는 '제3자 변제' 방안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외교의 일관성을 위해 뒤집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제3자 변제 방안 유지가 현실적 선택일 것이다. 다만 '강제 동원은 잘못'이란 우리 입장을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 윤 정부처럼 아무 입장도 없이 적당히 마무리해선 안 된다."
李-이시바 회담서 보인 교류·협력 의지 긍정적
일본과 협력 필수... 군국주의 등 성찰 선행돼야
과거·협력 중 하나만 강조 시 투 트랙 균형 깨져

-'제3자 변제' 방안엔 사실상 일본 기업의 자발적 기부나 참여가 전제돼 있다.
"양국 협력의 중요성을 감안해 우리가 양보한 것이다. 일본이 상응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지 않다.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주장처럼 이미 일본이 한국 발전에 도움을 주지 않았느냐는 인식을 가져선 안 된다."
-일본이 독도, 역사 교과서 등으로 과거사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총리급 유력 정치인들이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전쟁박물관(유슈칸)을 만들어 두지 않았나. 아직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사 갈등이 상존하지만 미중 패권 경쟁, 미국 우선주의 강화, 북핵·미사일 위협 등은 한일 협력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한미동맹에 기반한 한미일 안보 협력의 필요가 커지면서 일본과도 협력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되고 있다. 다만 미국이 모든 국제 문제를 떠맡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양국이 보다 정교하고 다층적 외교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한일 협력을 안보, 경제를 넘어 스포츠, 문화, 교육 등의 분야로 넓혀가야 한다."
-지난 4월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한반도와 동중국해, 남중국해를 하나의 전쟁구역으로 통합하는 '원시어터' 구상을 설명했고 대중 견제가 필요한 미국이 호응하고 있다. 한국 입장에선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투입 가능성에 따른 대북 억지력에 대한 우려가 크다.
"원시어터 구상이 실현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다만 미국은 20년 전부터 기동성 중심으로 주한미군 병력 운용을 재편해 온 만큼 '전략적 유연성 강화'라는 방향을 반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까지 가정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어떤 대책이 가능할 수 있나.
"외교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한일 공동체를 고민해 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까지 확대할 수 있다면 중국, 대만, 베트남 등을 포함한 동아시아 공동체도 가능하다. 국가를 의인화할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대에 기반한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군사력을 동원한 위협 금지, 인종과 국적 차별 없는 대우 등이 담긴 '동아시아 헌장'을 만들 수 있다면, 대만해협과 한반도 등 역내 무력 충돌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대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역내에 큰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지역 공동체 구상은 미국을 배척하자는 게 아니다. 동아시아 평화는 그간 각국이 미국을 중심으로 놓고 별도 관계를 맺으며 유지돼 왔다. 그러나 미국도 점차 자국 이익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에만 의지해 안전 보장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역내 국가들끼리 외교 관계를 다층적, 다각적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확대' 가정한 대책 필요
美에 기댄 안보 넘어선 다층적 외교 구축 나서야
'수교 60년' 한일, 지역 평화·번영의 틀 조성하길

-이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와 이시바 총리의 전후 80주년 담화가 수교 60주년을 맞은 한일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나.
"한일이 주축이 돼 지역 평화와 번영의 기틀을 조성하자는 제언이 담기길 바란다. 앞서 말한 사람 간 연대가 중심인 지역 공동체는 당장은 이상적 얘기로 들릴 수는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안보와 평화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한일 간에 그러한 제안을 함께 추진할 지적, 문화적 공감대가 있다고 본다."
-좀 더 설명해 달라.
"과거사와 관련한 한일관계를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으로 보지 말고,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일본 군국주의, 부국강병 정책의 희생자는 한국, 중국 등뿐 아니라 일본 국민도 포함된다. 안중근이 제시한 '동양평화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국가 간 기능적 협력을 통해 지역 평화를 추구하자는 내용으로, 당시로선 혁명적 제안이다. 그의 거사도 조선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한일 간에도 협력과 교류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결국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새 정부 외교에 제언할 게 있다면.
"새 정부가 외교 근간으로 밝힌 한미동맹은 매우 중요하다. 지난 정부는 '가치 외교'를 앞세워 중국, 러시아 등 대륙 세력과의 관계를 등한시했다. 새 정부는 중국, 러시아와 관계도 관리하면서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중러에 북한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균형자'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경희대 교수를 거쳐 김대중 정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1차장과 주영대사,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했다. 노무현 정부에선 주일대사를 지냈다. 이론과 경험을 고루 갖춘 원로 외교·안보 전문가다.
김회경 논설위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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