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와 교사의 합작 골… 클럽 월드컵 ‘아마추어 반란’

김영준 기자 2025. 6. 26.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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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시티 기적의 무승부
오클랜드 시티(뉴질랜드) 크리스천 그레이(맨 오른쪽)가 25일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2025 FIFA 클럽 월드컵 조별 리그에서 보카 주니어스(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후반 7분 동점골을 넣고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오클랜드 시티는 클럽 월드컵에 출전한 32팀 중 유일한 아마추어 구단으로 대부분 선수가 ‘본업’이 따로 있다. 이번 대회 팀의 유일한 골을 성공시킨 그레이의 직업은 체육 교사다./AFP 연합뉴스

3경기 동안 내리 17골을 내주다가 마침내 한 골이 들어갔다. 그 골에 오클랜드 시티(뉴질랜드) 선수들은 우승이라도 한 듯 방방 뛰며 기뻐했다. 상대는 과거 디에고 마라도나, 후안 리켈메 같은 ‘전설’들이 몸담았던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 보카 주니어스였다.

25일(한국 시각)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2025 FIFA(국제축구연맹) 클럽 월드컵 조별 리그 C조 3차전. 보카 주니어스가 0-1로 앞서던 후반 7분, 오클랜드 시티가 상대 진영에서 오른쪽 코너킥 기회를 잡았다. 제르손 라고스가 크로스를 올렸고,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크리스천 그레이가 머리에 갖다대 동점 골을 넣었다. 이번 대회 32팀 중 최약체로 평가받은 오클랜드 시티의 대회 첫 골. 오클랜드 시티는 이후 보카 주니어스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냈고, 슈팅 수 3-39의 열세에도 결국 1대1 무승부를 지켜냈다.

그래픽=백형선

오클랜드 시티는 이번 클럽 월드컵에 출전한 32팀 중 유일한 아마추어 팀이다. 선수 대부분이 축구가 ‘본업’이 아니다. 생계를 위한 다른 직업이 따로 있는 ‘투잡러’들이다. 이날 골을 넣은 그레이는 학교 체육 교사, 코너킥을 올려준 라고스는 이발사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레이는 경기 후 “이런 큰 대회를 늘 꿈꿔왔다”며 “비록 조별 리그 탈락이지만, 팀과 선수들 모두 행복하다. 우린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뉴질랜드에 돌아가면 채점해야 할 학생들 과제가 잔뜩 쌓여있다”며 “그나마 곧 방학이 시작돼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레이의 득점 후 함께 골 세리머니를 하며 기뻐한 수비수 니코 복솔은 부동산 중개인, 공격수 메이어 베반은 지역사회 축구 팀 코치이자 ‘틱톡’ 팔로어 70만명을 지닌 인플루언서다. 이날 10차례 선방 쇼를 펼친 골키퍼 네이선 개로는 오클랜드 대학교 재학생이다. 날개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한국계 데이비드 유(유승호)는 유소년 축구 팀 코치를 겸업한다. 그 외에도 배달 기사, 동물 의약품 회사 창고 관리인, 관상용 수목(樹木) 회사 직원, 코카콜라 영업 사원 등이 축구 열정 하나로 뭉쳤다.

오클랜드 시티 선수들은 평일엔 각자 직장으로 출근했다가 퇴근한 뒤 오후 5시 이후에 모여 훈련하고, 주말에 뉴질랜드 북부 리그에 출전한다. 홈경기가 열릴 때면 선수들이 자원봉사자 2명을 도와서 골대와 코너킥 깃발 등을 설치한다. 이번 클럽 월드컵 참가를 위해 선수들은 각자 연차나 무급 휴가를 내야 했다. 휴가를 내지 못해 클럽 월드컵에 동행하지 못한 선수도 있다고 한다.

오클랜드 시티는 1무 2패로 C조 최하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오클랜드 시티는 앞서 바이에른 뮌헨(독일)에 0대10, 벤피카(포르투갈)에 0대6으로 패배했다. 이미 16강 진출 실패가 확정된 상황에서 치른 보카 주니어스전도 비슷한 흐름일 거란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뜻밖의 무승부에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응원전을 펼친 보카 주니어스 원정 팬들 앞에서 이룬 쾌거였다.

사실 ‘체급’이 맞지 않는 상대였다. 뮌헨, 벤피카, 보카 주니어스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들이다. 선수단 추산 몸값 총액이 오클랜드 시티가 458만유로(약 72억5000만원)인데, 뮌헨은 그의 200배에 가까운 9억350만유로(약 1조 4300억원), 벤피카는 79배인 3억6350만유로(약 5754억원)에 달한다. 보카 주니어스만 해도 8655만유로(약 1370억원)다. 오클랜드 시티엔 매 경기가 ‘다윗과 골리앗’ 싸움이었다.

아마추어로 구성된 오클랜드 시티는 어떻게 세계 최고 구단들이 경쟁하는 클럽 월드컵에 나설 수 있었을까. 오세아니아 지역에선 오클랜드 시티가 그래도 최강 팀이기 때문이다. 클럽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오세아니아 대륙 대항전 ‘OFC 챔피언스리그’엔 뉴질랜드와 파푸아뉴기니, 바누아투, 피지, 타히티 등 축구 변방국의 아마추어 팀들이 참가한다. 오클랜드 시티는 이 대회에서 20차례 중 13회 우승을 차지한 최강자다.

뉴질랜드에 프로 축구팀이 아예 없진 않다.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본머스 구단주가 소유한 ‘오클랜드FC’ 등이 있지만, 이들은 호주 프로 리그에 참가한다. 그런데 호주는 오세아니아 축구연맹(OFC)이 아니라 아시아 축구연맹(AFC) 소속이다.

조 최하위로 탈락했지만, 오클랜드 시티는 이날의 무승부로 ‘돈방석’에 앉았다. 모든 출전 팀에 주는 기본 상금에 무승부 상금(100만달러)을 추가하면서 총 458만달러(약 62억원)를 챙겼다. 폴 포사 오클랜드 시티 감독은 “우리는 작은 팀이지만 거대한 심장을 가졌다”며 “오늘 우리가 얻은 결과는 그동안 모두가 뒤에서 묵묵히 노력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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