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법정 각본 뒤엎은 반전 드라마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5)]
“이 사건 재판은 무효다, 그 이유는…”
3·1운동 주도 민족대표 등 48인 재판
총독부 고법 ‘내란죄 아냐’ 경성지법으로
1920년 7월12일, 법정에 몰려든 민중들

“조선 독립운동의 ‘일대사극’(一大史劇), 세상이 주목할 제1막이 열렸다.”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민족대표 33인 등 3·1운동을 기획·주도한 48명의 첫 공판이 서울 정동철도부 경성지방법원 특별법정에서 열린 이튿날인 1920년 7월13일,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1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지난 1편(5월1일자 11면 보도)에서 이들 3·1운동 지도자 48명이 형법 제77조 ‘내란죄’로 기소됐다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에서 다시 옛 대한제국 법률로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 등을 적용하기로 결정된 과정을 다뤘다. 3·1운동 지도자 사건은 내란죄를 곧바로 다루는 최종심인 고등법원에서 1심인 경성지방법원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이들이 체포된 지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첫 재판이 열렸다. 앞선 동아일보 기사 제목처럼 국내외에서 주목한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 사건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이 재판이 얼마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지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보자.
■ 법정으로 몰려든 민중

1920년 7월12일 이른 아침. 전날 잠깐 개었던 하늘에서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날 오후 9시부터 경성지방법원 정문 앞에 재판 방청권을 얻으려는 수천명의 민중이 모여들었던 터다. 이들은 꼬박 밤을 새워 기다렸다. 하지만 배부된 방청권은 150장에 불과했다. 칼을 찬 일본 경찰 수십명이 모여든 군중을 통제했다. 힘겹게 방청권을 손에 쥔 사람들은 오전 7시부터 서너 차례의 신체 수색을 거쳐 법정으로 들어갔다. 재판 시작까지 2시간이나 남았으나, 법정은 순식간에 방청객으로 가득 찼다. 2
피고인들이 법원에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전 8시. 차량 여러 대에 나눠 탄 이들은 머리에 용수(죄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씌운 둥근 통)를 쓰고 수갑을 찬 채로 줄지어 법원으로 들어갔다. 1년 반 가까이 옥고를 겪었으나, 이들의 태도는 정중하고 모습은 당당했으며 더러는 웃음을 띠었다. 가족들이 감옥으로 차입한 깔끔한 여름옷을 차려 입었다. 방청권을 가진 사람 중에는 미처 방청권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피고인의 가족에게 양보하는 사람도 있었다. 3
이 재판은 독립운동 역사상 최고의 법정 드라마를 연출한다. 당시 언론은 재판의 시작부터 ‘일대사극’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재판의 시작점에선 앞으로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에 얼마나 거대한 ‘쓰나미’가 휩쓸지 일제 사법부도, 독립운동가 피고들도, 재판을 지켜보는 민중도 알지 못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격인 변호인 허헌(1885~1951)만이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를 맡아 조용하고 차분하게 법정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헌을 비롯한 한국인 변호사 8명과 일본인 변호사 2명이 3·1운동 지도자들의 변호를 맡았다.
“고법 주문 송치한다 없어” 허점 공격
송치 받지 못한 사건 심리 위법성 주장
일제 검사·재판장 당황, 30분 만에 폐정
■ “이 사건의 재판은 무효다”

7월16일 진행된 5번째 공판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변호인 허헌이 일어나 “이 사건의 공소(검사가 법원에 특정 형사 사건의 재판을 청구함)를 받아선(수리·受理)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외쳤다. 쉽게 말해 사건의 공소 자체가 무효라는 뜻이다. 그리곤 허헌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내란죄를 다루는 고등법원이 예심에서 내란죄가 아니라고 판단해 사건을 다시 지방법원으로 내려보냈다. 고등법원의 예심결정서를 보면, 그 ‘주문’(主文)에 ‘이 사건은 고등법원의 관할에 속하지 아니하므로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함’이라 했을 뿐 이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 ‘송치’(送致)한다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직 고등법원에 남아있는 것(계속·繫屬)이다. 관할 재판소만 지정받았을 뿐 송치받지 못한 이 사건을 이 법정에서 심리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다. 4 만약 재판부가 그대로 이 사건을 진행한다면, 마치 민사에서 원고가 기소하지 않은 것에 대해 경찰이나 재판소가 피고를 호출해 심리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사건의 공소를 수리하지 않아야 한다.” 5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법원의 판결은 크게 ‘주문’과 ‘이유’로 나눌 수 있다. 주문은 판결의 결론으로, 선고의 효력을 발휘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에서 헌법재판소 재판부가 ‘탄핵 인용’ 주문을 읽는 즉시 효력이 발생한 사례로 이해하면 된다. 판결에서 이유는 말 그대로 결론(선고)을 도출한 근거를 가리킨다.
일제강점기도 마찬가지였다. 허헌은 고등법원 예심결정서 주문에 ‘송치한다’는 말이 없고 이유 부분에만 그 내용이 있으므로, 사법부가 3·1운동 지도자들의 사건을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한 것은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률적으로 사건이 고등법원에서 지방법원으로 건너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현재는 수사기관에서 검찰청으로, 혹은 검찰청 간 사건을 넘기는 것만 송치라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포괄적으로 법원에서도 사건의 이송을 송치라고 했다.
사건을 맡고 있는 사카이(境) 검사는 벌떡 일어나 반박을 시도했다.
“대개 예심결정서의 해석은 주문과 이유를 대조해 해석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 결정서에는 비록 ‘주문’에 ‘사건을 송치한다’는 말이 쓰이지 않았더라도 그 아래 ‘이유’에는 ‘송치한다’는 말이 있어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벌써 1년 6개월 동안이나 미결수로 감옥에서 고생한 피고들이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를 다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변호인의 ‘공소불수리’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자 허헌은 다시 일어서서 당당하고 강경한 어조로 재반박했다.
“물론이오. 본 변호인도 피고들의 고생과 이해에 대해서는 깊이깊이 생각한 바가 있다. 하나 사건을 처리해 나아가는데 어찌 순서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있으며, 서류를 무시하고 법률을 무시할 수가 있겠는가. 본 변호인 생각에는 사건을 명백히 분석하지 않고 그대로 재판을 계속해 이번 공판을 마칠 경우, 만약 피고들의 상고심에서 본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재판은 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재판장은 1심에서 피고의 심문을 개시하기 전 이 문제를 판결해주길 바란다.”
사건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타치카와(立川) 재판장은 둥글한 눈을 더욱 둥글게 뜨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타치카와 재판장은 배석판사들과 두어 마디 귓속말을 하더니 잠깐 합의를 하겠다면서 합의실로 들어갔다. 법정의 공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피고들도, 방청객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무슨 말인가”라며 되물었다.
10분 후 합의실에서 나온 타치카와 재판장은 폐정을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더 깊이 생각한 후에 내일 다시 개정하고 공소를 받을지, 받지 않을지 심리하겠다.” 그 시각이 오전 9시 30분. 재판을 시작한 지 30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6
피고 오세창 “쓸데없는 걱정 말라” 조롱
만세운동 관련자 처벌 명분 사라질판
“불수리 문제만 심리” 일제 사법부 흔들
■ 발칵 뒤집어진 일제 사법부

7월17일 6번째 공판은 변호인과 검사의 맹렬한 논리 싸움으로 막을 열었다. 3·1운동 탄압의 핵심 사건에서 제기된 ‘공소불수리 신청’의 파장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날 역시 방청석은 만원이었다. 허헌은 씩씩한 태도로 다시금 논리를 전개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은 조선인 전체는 물론 세계인이 주시하고 있다. 본 변호인은 어제 이 사건이 고등법원에서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사건이 아직 고등법원에 계류돼 있는가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고등법원은 이미 이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보낸다고 보낸 것이다. 즉 ‘보내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기 때문에 고등법원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고등법원에 다시 보내달라고 청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방법원에서도 고등법원에서도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이라면 당연히 공소를 수리하지 말고 피고를 석방해야 한다.”
사카이 검사는 전날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재판장에게 항변했다. 타치카와 재판장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피고인들의 의견을 물었다. 서예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피고 오세창(1864~1953)은 “검사는 피고에게 미안하다고는 하나, 우리가 지난해 3월 이후 1년 6개월을 옥중에 있던 터라 시일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면서 “조금도 결점이 없는 정당한 법률을 적용해 처리하길 바라니, 검사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검사를 조롱한 후 빙그레 웃었다.
타치카와 재판장은 “허 변호사가 제출한 공소불수리 문제만 심리해 그 문제만 판결하는 기일을 따로 정해 발표하겠다”고 선언하며 이날 공판을 마쳤다. 7
일제 사법부는 발칵 뒤집혔다. 3·1운동 지도자들을 기소한 사건이 ‘무효’가 된다면, 전국적으로 연인원 200만명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산된 만세 시위 운동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의 명분 또한 사라진다는 의미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사법부의 권위는 물론 식민 통치 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사법부 내부에선 공소불수리 신청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판결 전부터 ‘사법관 대쇄신’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8
특히 이 사건은 3·1운동 지도자 48명의 공소 문제에만 해당하지 않았다. 애초 일제는 이 사건을 내란죄로 기소하려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일제는 내란죄를 구성하기 위해 경기도 안성(127명), 수원 장안면·우정면(27명), 황해도 수안(71명), 경남 창원(10명) 등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참여자 수백명을 ‘폭동’으로 묶어 48명 사건과 함께 기소했다. 기존 내란죄였다가 보안법 위반과 소요 등으로 공소가 변경돼 고법에서 지법으로 옮겨 온 이들 사건에도 똑같이 공소불수리의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법정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 것인가. 역사는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다음 편에서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뤄 보기로 한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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