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바친 꽃다운 청춘, 이제라도 인정받아 기뻐"
6·25 참전 오른발 잃는 큰 부상
평생 상이군인으로 고통스런 삶
자녀들에 자상하고 현명한 아버지
참전용사 봉사에도 헌신
'참전용사 무공훈장 찾아주기'로
70년 만의 '금성화랑무공훈장'
“생전에 받으셨다면 더 좋았을 것”

"(전쟁터에서) 오른발 절반이 날아가셨어요. 오랫동안 치료를 못 받으시다가 병원에 갔는데, 발목을 잘라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중학생 때였는데..."
6·25전쟁 참전용사 故 장경본 중사의 장남 장병윤(78)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회고하던 중 말을 잇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23세 꽃다운 나이에 3살배기 아들을 두고 전쟁터로 갔던 아버지는 2년 만에 지팡이 없이는 걷기도 힘든 '상이군인'돼 돌아왔다.
장병윤 씨가 회고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영웅적 서사시라기 보단, 순전히 한 인간의 생존을 위한 끝없는 투쟁에 가까웠다.

10대가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허리 필 여유는 없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제로부터 강제 징용을 당해 전쟁에 쓰일 의료품을 찍어내야 했다. 1945년 해방과 결혼, 그리고 아들까지 얻으면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둘로 나뉜 조국의 전쟁으로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안의 4대 독자이자,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9월 낙동강까지 밀린 전선 상황에서 변명거리가 되지 못했다.
장병윤씨는 "아버지가 자원 입대한 건 아니었대요. 지금 같았으면 4대 독자에다 애 딸린 남자를 입대시키면 난리날 거예요. 9월에 전선이 악화되면서 사실상 강제로 차출된 거죠"라고 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당시 군 기록 상당수가 훼손됐고, 장병윤 씨도 아버지로부터 세세한 지명이나 전투에 대해 들은 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산과 고지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이어졌고, 살을 애는 듯한 추위를 견뎌야 했다는 이야기 속에서 그가 1·4후퇴 후 고착화된 경기 북부·강원 북부 전선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혹했던 전쟁은 1953년까지 이어졌지만, 故 장경본 중사는 1년 일찍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포탄 파편이 그의 오른발을 꿰뚫으면서 엄지발가락 일부를 제외한 발 절반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1952년 3월 의병 전역을 할 당시 최전방의 추운 겨울을 나면서 얻은 만성 기관지 질환까지 겹치면서 그의 겉과 속 모두 망가져 있었다. 실제로 그의 국가유공자증에는 상이등급이 중증에 해당하는 1~3급 바로 아래인 4급으로 등록돼 있었다.
장병윤 씨는 "일상생활이 안되셨죠.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어요. 상처가 물이 들어가서 덧나면 안되니 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라며 "상처도 완전히 낫질 않아서 뼈가 계속 자라나요. 병원비 낼 형편도 안되니까 아버지가 집에서 직접 소독하고 뼈를 면도칼 같은 걸로 일일이 깎아냈었죠. 고생을 정말 많이하셨어요. 말년에는 폐색증까지 오면서 돌아가실 때까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습니다"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故 장경본 중사는 부상 휴유증을 겪던 와중 2003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2년 후, 무려 70여년 전 공식 수여한 것으로 알려진 무공훈장을 그의 자식이 받게 됐다.
국방부 6·25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사업단이 훈장기록부 명단에서 故 장경본 중사를 찾아낸 것. 공교롭게도 6.25전쟁 75주기를 불과 이틀 남겨둔 지난 23일 故 장경본 중사의 무공훈장 수여 여부가 확인됐다. 금성화랑무공훈장이었다.
장병윤 씨는 "뒤늦게라도 아버지의 공훈과 국가를 위한 헌신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면서도,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씁쓸함도 있습니다. 일단 받으면 아버지 묘소에 가져다 놓고 싶어요"며 "제가 올해로 아버지보다 1살 더 살았어요. 전쟁이 없었으면 아버지도 더 오래, 행복하게 사실 수 있었을까하고 상상을 곧잘 합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나 전쟁 없이 평화로웠으면 합니다"라고 기원했다.
윤병집 기자 sini20000kr@ius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