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호남 근대교육의 발상지 창평면 창흥학교(하-2)

선명완 2025. 6. 2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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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흥의숙 설립에 나섰던 주역의 옛집.

#일제 강점기 두 가지 일화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 창간한 신문이다. 창간 과정은 물론 이후 운영 과정에서도 양기탁을 비롯한 신민회와 민족주의 인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에서 중도좌파 성향을 지닌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의 통신원 자격으로 러일전쟁을 취재를 위해 파견되었던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일본 고베 등지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았던 모양인 터라 통신원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는 신문사 입구에 "개와 일본인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써붙일 만큼 항일 논조로 글을 실었다. 이 신문이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면서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뀌었다. 운영 주체가 바뀌었으니 조선총독부 기관지 노릇을 하였다. 오늘날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끝자락에서 창흥공립보통학교(당시 교명)에서도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기사이다. 이듬해인 1920년 1월 25일 매일신보 기사이다. 짧은 내용이라서 그대로 인용한다.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보통학교 생도 15명은 (1월) 23일 정오에, 또 (완도)고금도보통학교 생도 약 6명은 (1월) 21일 오후 1시를 기약하여 구한국 국기를 일제히 들고 독립 만세를 불러 소동을 일으켰음으로 당국에서는 수모자를 체포하고 해산을 명하였다더라." 당시는 학생 수가 약 50명 가량이었는데, 비교적 많은 수가 참여하였다. 누가 수모자(주동자)였는지, 어떤 이들이 참여하였는지, 이후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자못 궁금하다.

연말인 1920년 12월 21일 기사를 더 소개한다.

3면 9단에 단신으로 실렸는데 "송진우 외 2인 사건 조사, 전화한 것으로 의심 지금 구속 취조 중"이라는 제목 아래 "경성부 중앙학교 교사이던 송진우(宋鎭禹)는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고광준(高光駿), 박찬규(朴贊圭)와 협의하기를 지방에 교육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바 3인의 발기로 담양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송진우는 담양군 구암면 남산리 본가에 와서 있다가 지난 10일 경에 고광준에게 전화를 했다는데...(중략)... 경찰서에서는 그 전화 이유를 의심하여 송진우를 초래한 후 고광준, 박찬규까지 구속되었다"는 내용이다.

송진우가 고광준, 박찬규와 더불어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논의했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어 경찰서에 구금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창흥학교 동문들

창흥학교는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창평의 장흥 고씨를 비롯하여 전주 이씨, 함양 박씨, 김해 김씨 가문이 적극 참여하였다. 때문에 이 가문을 중심으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일이 탐문하고 구석진 자료를 들춰보면 더 많은 인물이 거론될 것이지만 이미 공개된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장흥 고씨 집안으로는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과 고재필(전 보사부장관) 형제, 고재욱(전 동아일보 회장), 고재호(전 대법관), 고재순(의사), 고재청(전 국회부의장), 고재기(전 서강전문대 학장), 고재량(변호사), 고재혁(변호사), 고재종(전 전남교육감), 고재일(전 전남대 법대 교수), 고정석(전 산업은행장), 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 고문석(전 한양대 교수), 고중석(전 헌법재판관), 고광표(대창주식회사 회장, 정치인) 등이 있다.

전주 이씨로는 이혁(전 전남대 문리대학장), 이진기(전 전남대 의대학장), 이승기(최초로 나일론을 개발한 전 서울대 공대학장), 이한기(전 국무총리) 등이 그들이다. 김해 김씨 문중에서는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아래 김사순의 남형제, 즉 이회창의 외삼촌), 함양 박씨로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소개한 박석윤(동경제대 졸, 전 외교관)과 석기(동경제대 졸, 일제에 맞선 국악인) 형제, 박영종(전 국회의원), 박승규(전 국회의원) 등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가문 출신으로는 널리 알려진 김성수(고려대 전신 보성전문 설립, 동아일보 사주, 제2대 부통령),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송진우(중앙학교 교장, 동아일보 창간), 이회창(전 국무총리)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회창의 어머니 김사순도 이 학교를 거쳐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곳 창평초등학교에서 잠시 교육활동을 하였다. 1908년 개교 첫 해 성적이 우수하여 수상을 하였다는 문용준, 박이규, 문병주, 임복동 등 다른 졸업생들의 행적도 매우 궁금하지만 역량과 공간이 부족하다.
 
창흥의숙 기념물.

#봉서마을 오지봉 가는 길

봄언덕 고정주의 묘소를 추적하는 길은 멀었다. 지리적, 공간적 거리가 멀었던 것은 아니다. 두 달 남짓 약 스무 분의 관련인들을 만나거나 연락을 한 끝에 최종적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고용진 전 의원과 연락이 되어 단서를 구할 수 있었다.

담양 창평과 봉산면 등 산자락 이곳저곳 고씨 집안 묘역을 대부분 살폈지만 의외로 그의 묘소는 곡성군 오산면 봉서마을 뒷산 오지봉(梧枝峰) 3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다. 창평에서 도로 거리로는 약 15km 지점이다. 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생가나 교육 현장 같은 생애 터전을 확인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묘소를 찾아 제주 한 잔 올리며 참배를 드리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지만 고정주의 묘소 사진 등 소재지 파악이 안 되었다는 점은 의외였다. 그의 행적이 후손이나 관련 연구자들에게 일제 강점기 또는 이후에라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뜻일까. 본인의 유언이 아니라면 입비 작업은 당대라기보다는 후대, 후손들의 업적이었다 할지라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를 거친 인물들과 후손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행적으로 추적하기에는 쉽지 않은데, 그기 남긴 필사본 <일기>나 『춘강유고집』이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접근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졸년이 1933년이니 입비 시기가 매우 늦었다. 계축년(1973년) 6월, 춘강 사후 40주년에 맞춰 진행된 모양이다. 비문은 손자이자 동아일보 회장을 지냈던 고재욱(1903~1976)이 찬술하고, 글씨는 나의 고향 보성군 복내면 출신 서예가 송곡 안규동(1907~1987)이 썼다.

비문에 의하면 그의 묘소는 곡성군 오산면 조양리 부계원이다. 부인인 반남 박씨가 1년 전에 먼저 돌아가서 묘소를 창평 강촌마을 앞산 기슭에 썼는데, 이때 이장하여 조양리 부군의 묘소 왼쪽에 합장(合祔)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묘역이 오산면 봉동리 오지봉이며, 하나의 봉분에 합조(合兆)한 형식이라서 재이장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고정주는 2남2여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광일(光馹)이며 차남이 광준(光駿)이다. 비문의 말미에 비문을 짓게 된 연유를 밝혔다. 광일의 장남이자 재욱의 종형인 재현(在賢)이 본인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지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길어지는 창평 이야기

이야기가 길어지고 길어졌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창평상회, 창평국밥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특히 창흥학교 최초의 여성 입학생, 대한민국 균학의 기초를 정립한 불굴의 여성 김삼순(金三純)의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은 내용이다. 그의 행적을 일일이 추적하여 공개할 예정이니 기대하시기 바란다.

선명완 담쟁이 대안교육연구소 소장
선명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