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놀라워서 놀랍지 않은 세상

한때 흔히 사용하던 말이었는데 어느새 찾아보기 어렵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상치 못할 만큼 큰 숫자나 내용을 말할 때 앞에 붙곤 하던 ‘물경(勿驚)’도 그렇다.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충격을 완화하려고, 혹은 오히려 기대를 더 크게 하려는 의도로 “놀라지 마시라, 자그마치…”라며 뜸 들이는 표현이다.
일본어에서 온 게 분명해 보이긴 하지만, 이 말이 덜 쓰이게 된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혹 사람들이 점차 그 무엇에도 별로 놀라지 않게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불과 2년 반 전 미국의 한 기업이 만든 대화형 인공지능 서비스의 출현이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그 뒤로 한 달이 멀다 하고 경천동지할 기술들이 쏟아지고 있다. 글은 물론 음악과 영상을 생성해 내고 웬만한 조직을 대신할 행정 능력까지 장착한 인공지능의 등장에, 이젠 놀라기도 지친다. 그 기술의 개발에 필요하다는 천문학적인 예산에 또 한번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그 와중에 이 땅에 선포된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계엄령은 또 어떤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지새운 그 밤을 잊을 수 없거니와,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계속되었다. 기상천외한 논리로 법을 해석하며 그 법의 이름으로 빠져나가는 이들을 보며, 이젠 무슨 짓이 자행되어도 놀랍지 않을 정도가 됐다. 요 며칠 날아드는 뉴스는 더욱 참담하다. 공적 절차 없이 대통령의 엄포와 결정만으로 엄연한 주권 국가의 영토에 폭격을 가하고, 그 소식이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발표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트럼프가 트럼프했네”라는 반응이 앞선다.
세계를 전쟁의 비극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 앞에서도 의외로 크게 놀라지 않는 듯하다. 다들 이제 놀라움에 이력이라도 난 것일까.
놀라야 마땅한 일에 놀라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온갖 상식이 무너져 내려 힘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시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력이 난다’고 할 때의 이력(履歷)은 ‘많이 겪어 보아서 얻게 된 슬기’를 뜻한다. 세상이 우리를 놀라움마저 무뎌질 만큼 몰아세우더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진정 놀라워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분별해 낼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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