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시대] 국민주권시대, 공론장으로 주권실현 시작

"지역과 우리의 미래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
2025년 4월, 의정부 시민들은 이 물음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의 손으로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는 현장에 나섰다. 이는 단순한 개발계획 수립을 위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을 되묻는 실험이었으며, 그 현장이 바로 'CRC공론장'이었다. 오랜 세월 주한미군기지였던 캠프 레드 클라우드(CRC)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지금, 의정부 시민들은 행정기관이나 특정 전문가가 아닌, 주민 스스로가 지역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지위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본위원으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 과정에 참여하였고, 자치분권 확대를 위한 연구 및 실천을 지속해온 입장에서, CRC공론장에 특강 강연자로 참여하면서 이번 공론장은 단지 하나의 지역 프로젝트를 넘어, 대한민국 숙의민주주의의 진화를 상징하는 전환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공론장에 참여한 시민들은 단순히 찬반을 넘어, 해당부지 개발의 주체 및 방식에 대한 다양한 대안을 놓고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국가 주도 개발, 지방정부 주도 개발, 국가의 무상양여를 통한 지방정부 주도 개발, 제3의 복합적 대안 가능성 등을 두고 이뤄진 시민 숙의는 단순한 여론이 아닌, 고도의 정제된 합의로 귀결되었다.
이는 전통적인 행정계획 수립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바로 그 점에서 CRC공론장은 대한민국 자치분권사에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러한 공론장은 이론적 관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우선,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은 시민 간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을 통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이러한 '담론윤리(discourse ethics)'를 실현 가능한 정치모형으로 제시한다. CRC공론장은 이러한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이 구체적인 제도와 절차 속에서 구현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피시킨(J. Fishkin)의 '숙의형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 이론은 공론장을 통해 형성된 시민의견이 단순한 직관이나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정보 제공과 숙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는 점에서 정책결정에 더 큰 정당성과 지속가능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CRC공론장에서 시민들은 다양한 자료를 숙지한 뒤 전문가 및 타 참가자들과 토론하며 의견을 정립하였고, 이는 공론장의 합의가 형식적 동의가 아닌, 실질적 공감과 이해에 기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CRC공론장이 갖는 가장 본질적인 의의는 참여민주주의를 넘어 숙의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주민참여가 정책결정 이후 수동적으로 참여하거나 찬반을 표명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번 공론장은 시민이 정책의 방향 자체를 설계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동적 구조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정치·행정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즉, 헌법 가치인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며, 이는 향후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가 지향해야 할 정책 패러다임의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CRC공론장은 향후 주한미군 반환공여지 정책, 도시재생정책, 갈등관리 모델 등에 적용 가능한 하나의 모범 사례로 기능할 수 있다. 특히, 주민참여예산, 주민참여형 도시계획, 시민참여 포럼 등 기존 제도와 CRC공론장의 숙의 방식이 결합될 경우, 행정의 민주성과 정책의 정합성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다.
이 실험의 경험과 교훈은 전국으로 확산되어야 하며, 행정 각 분야에서 주민참여의 제도적 기반이 될 필요가 있다. 특히, 향후 자치분권의 강화와 맞물려 주민참여형 공론장 모델을 지속적으로 제도화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시도들을 일회성이나 전시성 주민참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협력하여 주민주권 시대를 선도하는 국가적 모델로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행정의 민주화를 위한 장치가 아닌, 정책의 정당성과 신뢰성,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정기적인 선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주민이 스스로 삶의 문제를 직접 논의하고 결정하는 구조,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CRC공론장이 우리 사회에 보여준 감동의 메시지이다.
이제 '제2, 제3의 CRC공론장'이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져야 하고, 그 공론의 장(場) 위에 시민을 중심으로 행정기관과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와 학계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번 이재명 정부의 국민주권시대는 바로 오늘 이 순간부터 추진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공론장 활성화를 통한 주민주권의 실현'이어야 한다.
장인봉 신한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Copyright © 저작권자 © 중부일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