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3·1운동 이끈 비밀조직 ‘신문잡지종남소’ 아시나요.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경복궁 근정전에 대형 일장기가 내걸렸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탈했다. 그리고서 10여 년이 흘렀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밀 결사체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독립의군부(1912), 조선국권회복단(1915), 대한광복회(1915), 조선국민회(1915)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광주·전남지역은 1910년대 초반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1894~1895년 동학농민혁명과 1907~1909년까지 의병투쟁으로 투쟁에 나설 인적자원이 거의 소멸 상태였다. 세월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1917년 드디어 광주에 항일과 독립을 기치로 내 건 비밀결사체가 등장했다. 당시에도 이름도 생소한 '신문잡지종람소'였다.

# 겉으로는 신문잡지 보는 공간일 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잡지종람소는 1898년 인천항에 첫 모습을 보였다. 종람소(縱覽所)란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신문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1902년 11월 25일 서울 명동 경성학당에 제대로 된 종람소가 문을 열었다. 1898년 일본어 교육기관으로 개교한 경성학당은 학당 내부에 신문과 잡지 수십 종을 구입하여 매일 오후 1시부터 8시30분까지 관람을 허용했다.
'종람소'는 진열대에 늘어서 있는 신문잡지를 볼 수 있는 공간이란 뜻이다. 신문을 보는 공간은 애국계몽운동에서 출발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매체가 잇따라 창간하면서 신문 구독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 수요를 수용한 공간이 바로 신문잡지종람소였다.
광주의 종람소는 광주광역시 동구 천변우로 415 옛 광주적십자병원 일원에 들어섰다. 이곳은 옛 사립측량학교 터였는데, 후일 광주농업학교가 들어왔다. 농업학교가 떠나면서 광주의 부호 정낙교가 이 건물을 소유했다. 정씨의 아들인 정상호는 광주보통학교(4회) 출신으로 부친을 설득해 옛 농업학교 건물을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배려했다.
독립운동가 고 최한영 선생은 생전에 "10여 명의 젊은 학생들이 공부하고, 신문 잡지를 읽으며, 세계 정세와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는 공간이었다"면서 "가끔씩 존경하는 인사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박해현 저 최한영 평전)
광주 종람소는 타 지역은 정보를 교환하는 문화공간이었지만, 광주는 전혀 달랐다.
# 광주 초.중등 학교 학맥으로 비밀 운영
광주 종람소 운영은 소수 회원제였다. 공개모집도, 회원이란 용어 자체도 없었다. 건물 주인만 있을 뿐 누가 운영 주체인지 알수 없었다. 종람소 비밀 운영 주체들은 광주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출신에, 양림교회 일부 신자들이었다. 지역사회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동문 중심 조직인 셈이다. 이들 운영주체들은 도쿄에 유학중이던 광주보통학교 출신 정광호(4회) 등과 국제 네크워크를 형성,세계정세도 파악했다.
광주종람소의 운영 주체인 비밀결사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독립운동가 강석봉 선생 유족의 사진, 독립운동가 최한영 선생의 증언,1919년 3월 6일 광주 3·1운동 시위모의 재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밑그림은 그릴 수 있다.

첫째, 1919년 광주 3·10만세 운동 직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이다.
강석봉 선생의 손자 강양진 씨가 소장중인 이 사진은 3월 1일 서울 만세 시위 소식을 듣고 광주에서도 시위를 결의하며 찍은 단체사진이다. 주인공은 ▲강석봉 ▲김용호 ▲김복수 ▲김태열 ▲최한영 ▲강생기 ▲오영표 ▲김용규 ▲최운걸 등 모두 9명이다.
두루마기를 입거나 양식 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으로 상당한 격식을 갖춰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강석봉과 김태열은 광주보통학교 동문이며, 종람소 건물주인 정상호와도 동문이다. 고 강석봉 선생은 이 사진에 후일 '3.1운동 비밀결사 신문잡지종람소'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야정 강석봉 평전'을 쓴 박해현 초당대교수는 "사진 속 인물들이 광주 종람소의 회원이었으며, 실질적으로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이라면서 "최한영 선생은 신문잡지종람소를 지하단체라고 회고했다" 밝혔다.
둘째, 고 최한영 선생이 회고하는 종람소 멤버들이다. 이들은 주로 광주보통학교를 졸업했거나,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한 인물들이다. ▲정상호 ▲김복수 ▲박팔준 ▲최한영 ▲김용규 ▲한길상 ▲강석봉 ▲김태열▲강생기 등이다. 강석봉과 한길상은 농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항거하다 퇴학을 당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셋째, 광주시위 모의를 위해 1919년 3월6일 밤 양림동 남궁혁 집에 모였던 그룹이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논문 '광주 3·1운동의 재구성'에 따르면 이날 모인 인사는 모두 10명이다. 이들은 당시 평양장로회 신학생이던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남궁혁 집에서▲ 김강의 연락을 받고 ▲김복현 ▲최병준 ▲송흥진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 ▲손인식 등 이다.
노 원장은 "김복현 등은 양림교회 교인이었고, 한길상, 김용규, 김태열, 강석봉은 신문잡지종람소가 이름을 바꾼 삼합양조회 회원이었다"면서 "신문잡지종람소는 비밀 독서회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이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종합하면 신문잡지종람소 비밀회원은 대략 12명으로 보인다. 회원들은 ▲강석봉 ▲김용호 ▲김복수 ▲김태열 ▲최한영 ▲강생기 ▲오영표 ▲김용규 ▲최운걸 ▲정상호 ▲박팔준 ▲한길상 등이다. 다만, 양림교인 중에서 일부는 종람소 회원일 수 있어 정확한 인원을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광주 신식학교, 보통학교와 농업학교
종람소 비밀결사의 주축인 광주보통학교는 1906년 11월1일 문을 열었다. 개교 당시에는 1~4학년 각 1학급 50명 규모였으며, 1910년 11월1일 광주공립보통학교로 개명했다. 이어 1911년 11월에는 다시 공립 광주제1보통학교로 바뀌었다. 조광철 광주역사민속박물관 학예실장은 "광주보통학교는 광주 유일의 신식학교로 인텔리 집단으로 광주사회의 핵심인력 자원이었다"고 말했다.
광주농업학교는 1909년 6월10일 광주 최초의 1년제 도립광주농림학교로 출발했다. 농업과와 보통과 2개 반으로 편성됐고, 1910년 옛 사립 측량학교 건물에 입주하면서 학교 운영의 틀을 갖췄다. 1911년 광주공립농업학교로 개칭하면서 2년제 농업과 20명, 보통과 20명으로 학사일정을 진행했다.
광주지역 청년 엘리트들의 활동은 일제 경찰에 포착됐다. 일제는 건물주인 정낙교를 압박했다.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종람소 비밀회원들은 1918년 충장로 4가 한 한옥(현 NC웨이브 충장점 인근 )으로 이전하고 '삼합양조장'이라는 위장간판을 내걸었다. 종람소가 떠난 자리에는 광주면사무소가 들어왔다.
옛 종람소였던 삼합양조장 회원들은 1919년 들어 일본에 유학중이던 최원순, 정광호, 이이규와 소통하면서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프랑스 파리에서 식민지 해방 논의를 벌인다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식민지 국가들이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청년들은 가슴이 뛰었다.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쳐야 한다" 광주와 경성에서 동시에 대규모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상 기자 lgs@namdonews.com
위치 : 광주 동구 천변우로 415 옛 광주적십자병원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