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정원, ‘6·25 처형자 명단’ 보안심사도 끝내놓고…윤 정부 들어서니 “진화위 못 줘”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2만6330명이 담긴 ‘6·25 처형자 명단’을 50년 가까이 보관해왔던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문재인 정부 시절 이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전량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보안심사까지 마쳤다가, 윤석열 정부 취임 직후 갑작스레 취소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 진실규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해당 자료 제공이 윤석열 정부 취임과 박지원 전 국정원장 사임 뒤 석연 찮은 이유로 취소된 정황이 추가로 드러난 것이다.
2기 진실화해위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2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진실화해위 업무를 위해 국정원 해당 자료를 달라고 박지원 당시 국정원장을 두 번이나 만나 강력하게 요청했고, 국정원 직원이 위원장실에 찾아와 ‘다음주에 가져오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취임과 함께 박지원 원장이 사임하자 없던 일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정근식 전 위원장은 “처음에 박지원 원장이 자료제공을 약속했는데도 국정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아 재차 박 원장을 만나 독촉했다”며 “당시 자료가 10권 정도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2기 진실화해위 초기 상황을 잘 아는 전직 고위 관계자도 “해당 명단은 정근식 위원장이 재임할 당시 국정원이 수개월에 걸쳐 보안 심사를 한 뒤 이관을 결정했던 자료였다”며 “하지만 국정원은 이후 별다른 설명 없이 시간을 끌다 보안심사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통지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국정원이 입장을 바꾼 시점은 윤석열 정부가 취임하고 박지원 국정원장이 물러난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다. 국정원이 명단 전량제공을 위해 내부 규정에 따라 단계별로 보안 심사를 마쳤으나 정권교체가 되자마자 일순간 없던 일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앞서 한겨레는 국정원이 1978년 중앙정보부 시절 6·25 당시 처형자 2만6330명과 그 연고자 3만8135명의 명단을 작성해 책자로 발간한 뒤 보관해왔고, 진실화해위가 2020년 12월 출범 초기부터 국정원에 이 자료 제공을 요청해 협의를 진행했으나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무산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명단엔 한국전쟁 발발 전후에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부역 혐의로 학살되거나 형무소(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군경에 의해 처형된 이들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과 가족·친척 등 연고자 1~2명의 이름 및 관계, 시찰 분류표가 들어있다.
당시 국정원장을 지낸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국전쟁 처형자 명단 제공과 관련 보고받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면서도 “당시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을 만난 일은 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이어 “국정원장 재임 당시 5·18, 세월호, 부마항쟁 자료 등 내어줄 수 있는 자료들은 다 내어주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2020년 8월부터 2021년 3월까지 5.18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 관련 기록물과 사진 등을 각각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와 부마민주항쟁 심의위원회에 제공하고, 세월호 사건 관련자료의 열람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 허용한 바 있다.
국정원은 ‘6·25 처형자 명단’의 전량 제공 방침을 백지화한 이후 진실화해위가 개별 신청사건 진실규명 대상자의 신원을 보낼 경우 동일인으로 판단된 건에 한하여 국정원 방문을 통한 명단 열람은 허용해왔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를 관할하는 조사1국은 이 명단의 신뢰도를 높게 보고 사건 신청인이 명단에 등장할 경우 무조건 진실규명으로 결정해왔다고 한다. 진실화해위 안팎에서는 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할 경우 이 자료를 반드시 모두 입수해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에 대해 직권조사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6·25 처형자 명단’에 기재된 희생자 2만6330명은 1기 진실화해위(2005~2010)와 2기(2020~2025)에서 각각 진실규명 결정된 6742명과 6092명을 합한 1만2834명의 두배가 넘는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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