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릴 땐 하영 지꺼져"… 제주 선흘마을엔 '그림할망'들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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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동쪽 중산간에 위치한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그림할망 중 9명이 첫 번째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주제로 그린 작품들을 모아 '폭싹 속았수다, 똘도 어멍도 할망도' 전시회를 이달 29일까지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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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등 개조해 개인 미술관 운영
레지던시 열고 전시회도 개최

제주도 동쪽 중산간에 위치한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흔히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의 작은 마을이지만 수년 전부터 전국에서 미술관이 가장 많은 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초록미술관, 소막미술관, 동백미술관, 올레미술관, 마당미술관 등등 마을 전체가 미술관이다.
더 특별한 것은 미술관들을 운영하는 작가이자 관장인 할망(할머니의 제주어)들이다. 초록할망 홍태옥(89), 고목낭할망 김인자(87), 소막할망 강희선(89), 무지개할망 고순자(87), 신나는할망 오가자(87), 우라차차할망 조수용(96), 우영팟할망 김옥순(80), 무화과할망 박인수(80), 불할망 허계생(73), 밧할망 박경일(90), 춘자할망 윤춘자(90)씨. 이들이 바로 평균연령 87세인 '선흘 그림할망'이다.
그림할망들은 살고 있는 집 창고나 소막(축사) 등을 개조한 자신들만의 미술관이자 작업장에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최근 그림할망들의 작품을 보러 오는 방문객이 늘자 마을 주민과 자녀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옛 농협 창고를 임대, 작업장이자 레지던시(창작실)인 '선흘그림작업장'으로 새 단장을 했다. 그림할망 중 9명이 첫 번째 레지던시 작가로 참여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주제로 그린 작품들을 모아 '폭싹 속았수다, 똘도 어멍도 할망도' 전시회를 이달 29일까지 열고 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림할망들은 유명하다. 수시로 국내외 학생들이 찾아와 할망들이 그림을 시작한 과정을 듣고 함께 그림을 그리며 교감을 나눈다. 지난 5일에는 선흘그림작업장에 미국 프린스턴대 학생 12명도 방문했다. 이날 프린스턴대 학생들은 "80세가 넘어서 그림을 시작했다는 게 신기하고, 그 용기가 대단하다 생각한다"며 "모두 할머니들의 사연이 담긴 그림들도 감동적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림할망들이 붓을 잡은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2021년 선흘마을로 이주한 최소연(58‧소셜뮤지엄 대표) 작가가 이웃 주민인 홍태옥씨의 '그림선생'을 자처했다. 어설픈 실력이지만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홍씨의 모습을 기웃거리던 다른 마을 할망들도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할망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지금은 열한 명의 할망들이 평생 생각지도 못한 화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딸로 태어나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고,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 등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자식들을 지켜야 했던 어머니로 평생을 살다 팔십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돼서야 잊어버렸던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써넣은 셈이다. 그림 속에도 이들의 지난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림 실력이 기성 화가들에게 미치지 못해도 작품 안에 담긴 할망들의 삶과 기억들은 관람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우영팟(텃밭의 제주어)에서 재배하는 밭작물을 주로 그려 우영팟할망이란 별명을 얻은 김옥순씨는 "어릴 때는 아들만 학교 가고, 딸들은 집안일을 하거나 동생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것은 평생 생각하지도 못했다"며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고, 하영 지꺼져(많이 기쁘다). 자식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잘한다. 잘한다' 하니 더 신나서 그리게 된다"고 말했다.

최소연 작가는 "평생 밭일만 하시던 할머니들이 농기구 대신 붓을 잡았고, 이제는 어엿한 화가가 돼 벌써 다섯 번째 전시회를 열게 됐다"며 "다음에는 연구자, 큐레이터, 건축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창작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림할망들이 새로운 예술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주= 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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