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미로 / 이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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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거의 대다수가 어지럽게 갈래가 져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을 용케 헤쳐나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누군가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웃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물론미로는 웃음에 관한 고찰 시편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미로의 전반적인 기조는 칙칙한 회색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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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 이경임
궤양이 심한 날엔 브람스가 제격이죠/ 변주는 재빠르게 커튼을 내리고/ 조립한 어둔 발소리 아직은 낯설어요// 약봉지에 붉게 젖는 노을을 견뎌 봐요/ 우울한 반음계는 통점을 감추고 있죠/ 까칠한 얼굴 하나가 허공에 떠다녀요// 무구는 지치지 않고 지극한 밤 두드리고/ 때로는 삼킬 수 없는 혼돈에 머물러요/ 상처는 굳게 닫아놓은 문 앞에서 덧나죠// 슬픈 꿈 꾸다 오는 새의 눈 닿는 곳에/방향을 놓쳐버린 수집가의 손이 있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날이예요
『정음시조 제7호』(2025, 제라)
현대인은 거의 대다수가 어지럽게 갈래가 져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을 용케 헤쳐나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누군가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웃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 실없이 웃어서는 안 되겠지만, 웃음기 없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 보인다. 모두 쫓기듯 살기 때문이다. 물론「미로」는 웃음에 관한 고찰 시편은 아니다. 글머리에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 웃음을 잠시 부각해본 것이다.
「미로」의 기조는 어둡다. 먼저 툭 다가온 시어는 궤양이다. 그 증세가 심한 날엔 화자는 브람스를 듣는가 보다. 이어서 변주는 재빠르게 커튼을 내리고 조립한 어둔 발소리 아직은 낯설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둔 발소리를 조립했다는 대목이 신선하면서도 금방 와닿지를 않는다. 아프니까 약을 받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약봉지에 붉게 젖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견디어볼 것을 요청한다. 우울한 반음계는 통점을 감추고 있고, 까칠한 얼굴 하나가 허공에 떠다닌다고 노래한다. 통점을 감춘 반음계는 우울하다고 진단하고, 허공을 떠다니는 얼굴 하나를 두고 까칠하다고 수식하는 대목 등에서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엿보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미로」의 전반적인 기조는 칙칙한 회색빛이다. 어떤 점에서 적절한 치유가 필요하다. 무구는 지치지 않고 지극한 밤 두드리고, 때로는 삼킬 수 없는 혼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청정함 즉 번뇌가 없는 상태의 무구가 등장하여 밤을 두드리니 혼돈을 벗어날 길이 열릴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일단 셋째 수 초장과 중장의 이미지는 서로 충돌 중이다. 그리고 상처는 굳게 닫아놓은 문 앞에서 덧난다는 종장에서 다시 막혀버린다. 이것은 의도된 어떤 혼란인 듯하다. 슬픈 꿈 꾸다 오는 새의 눈 닿는 곳에 방향을 놓쳐버린 수집가의 손이 있다는 끝수 초장과 중장도 예사롭지가 않다. 시방 시 읽기가 미로 속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진정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날, 모르는 순간인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로」가 의식의 흐름을 좇은 좋은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현대인의 복잡미묘한 정신세계를 치밀하게 육화했기 때문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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