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도살 사기’, 신뢰는 어떻게 조작되는가?

기호일보 2025. 6. 2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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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기 법률사무소 리엘파트너스 대표변호사
이승기 법률사무소 리엘파트너스 대표변호사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이 사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짜'였다면 어떨까? 영상통화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울고 애틋한 감정까지 나눴던 그 모든 순간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 배신감은 상상조차 어려울 것이다.

최근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규모 사기 조직이 우리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됐다. 이들 일당은 딥페이크 기술로 미모의 여성을 만들어 낸 뒤 가족관계에 성격, 학력, 직업, 재산에 이르기까지 가상의 인적사항을 더해 마치 진짜 사람인 것처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철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피해자와 지속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식으로 피해자로 하여금 유사 연애 감정을 갖도록 해 거액을 편취했다. 피해자는 100여 명에 달하며 피해액은 약 120억 원으로 추산된다. 

그동안의 로맨스 스캠이 전화 통화와 SNS 메신저를 통해 이뤄졌다면 이번 사건은 '리얼타임 페이스 스와핑' 기술을 통한 실시간 영상통화로 피해자를 속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바로 내 앞에서 웃고 울며 생일 축하 노래까지 불러줬던 그 사람이 알고 보니 가짜였던 것이다. 보이스피싱에 로맨스 스캠까지 비대면 사기가 기승을 부리며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범죄자들은 각종 첨단 기술을 활용해 '보이는 것'을 조작해 내며 스스로 진화한 것이다.

여기에 이들 일당이 사용한 사기 수법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피해자의 신뢰를 얻게 되면 어느 순간 "요즘 투자를 시작했다"며 피해자에게 가짜 투자 플랫폼을 소개한다. 이 플랫폼은 실제 수익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게 거짓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적은 돈을 투자케 해 수익을 환급해 주는 식으로 환심을 산 뒤 더 큰 돈을 투자하게 만들어 이를 편취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금융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받아 마련한 돈마저 빠져나가고 나서야 사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이 이른바 '돼지도살 사기(Pig Butchering Scam)'의 핵심이다. 돼지도살 사기는 마치 돼지를 살찌워 도살하듯 피해자의 감정을 길들여 신뢰를 쌓은 뒤 큰돈을 한꺼번에 빼앗는, 최근 유행하는 범죄의 대표 격이다.

더 이상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상통화로 얼굴을 마주한 채 속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해서 실존 인물이라 단정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는 '신뢰'를 판단하는 기존의 가치질서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됐음을 의미한다. "보이는 것조차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는 충고는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물론 정부와 수사기관도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딥페이크 기술이 범죄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규제를 강화하고 처벌 수위도 높여야 한다. 특히 피해 예방을 위한 교육과 홍보 캠페인도 필요하다. 여기에 금융감독원과 경찰청은 신고받은 즉시 범죄에 사용된 대포통장을 사고계좌로 지정해 범죄자들이 돈을 인출하지 못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지금은 현행범이 아닌 이상 피해자들이 경찰에 신고해도 담당수사관이 지정될 때까지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텅 빈 계좌로는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신속한 수사가 절실하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심리경보시스템' 도입도 고려할 만하다. 사용자 설정에 따라 대화에서 범죄로 의심되는 정황이나 비정상적 감정 몰입이 감지되면 경고 신호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각자의 인식 변화다. 온라인상에서 빠르게 친근감을 보이는 사람은 경계하고 아직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호의를 베푼다면 그 의도를 의심해야 한다.

생활비나 항공료 수준의 돈을 편취하던 로맨스 스캠이 첨단 기술을 통해 돼지도살 사기로 거듭났다. 감정과 신뢰를 무기로 삼아 개인의 삶과 자산, 심지어 정신적 기반까지 파괴하는 중대 범죄가 대중화된 것이다. 신뢰는 현실에서 검증돼야 하고 투자는 이성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뻔한 진실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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