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의 진면목

경북도민일보 2025. 6. 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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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이 스토리 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지역도 없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수많은 삶의 궤적과 이야기가 만들어지듯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세월을 거쳐온 공동체의 결과물이 된다. 결국 그것은 그곳의 정체성으로 굳어지며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 결국 매력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문경새재는 사람의 발길과 지역 간의 이동이 시작한 때부터 교통과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 공간이 되었다. AD156년 한반도 최초의 공식 국도가 개설된 계립령은 지역과 지역 간에 소통의 공간이 되었다. 연접한 문경새재도 조선이 시작되면서 국가 도로로 공인이 되었지만, 전해지는 설화와 남겨진 유적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시대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조령산과 주흘산을 간직하고 있는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의 경계,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영남은 조령산 아래의 지역을 말한다. 고려말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기존 행정구역을 조선 태종 때인 1413년에 팔도체계로 가져가면서 지방 구분이 되었는데 이때 관서, 관북, 관동, 영동, 영서, 영남, 호서, 호남, 기호 등의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영남의 별칭을 교남(嶠南)이라고 한다. 교는 뾰족하다는 뜻이다. 즉, 뾰족하게 생긴 주흘산을 의미한다. 영남은 조령산 아래를, 영남의 별칭인 교남은 주흘산 아래를 뜻한다. 문경새재는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을 가르고 합하는 경계에 있는 점이(漸移) 공간이다.

경상도 관찰사가 임금에게 소임을 받아 경상도 땅이 시작하는 문경에 이르면 소임을 마친 관찰사를 새재 내에 있는 교귀정(交龜亭)에서 만나 업무 교대식과 관인을 교환한다. 업무의 시작과 마침이 문경새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교통과 국방상의 중요 거점지역으로 부상하면서 성곽 건립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되어 왔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에서나, 예산이라는 현실적 벽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1592년 새재를 제대로 막질 못해 충주가 뚫렸고 이에 따라 한양을 포함한 전 국토가 7년간 유린당하였다. 결국 서애 류성룡 선생의 건의로 1594년 현재의 2관문이 세 개의 관문 중 처음으로 축조가 되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있어야 할 중요군사시설이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격이 되었다. 그래도 사후약방문이라도 처방되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만 했다.

서애집 별집 제4권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적병들은 조령 길 주위에 우리의 복병이 있을까 겁을 먹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면서 두세 번 거듭 복병을 두지 않았나 정탐하였다. 마침내 복병이 없음을 자세하게 알아차리고는 조령을 통과하였다. 뒤에 명나라 제독인 이여송(李如松)이 조령을 보고 탄식하기를 '이와 같은 천연적으로 된 험난한 요새를 버려서 적병에게 내주었으니 신립 총병(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라 하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본 조령의 지세는 2관문에 연접해 있는 응암을 보고 얘기한 것이다. 응암은 매의 형상을 한 바위를 말한다. 누가 봐도 적은 병력으로도 비록 중과부적이지만 충분히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애 선생은 다른 성곽도 아닌 관문성 건립을 건의하게 된다.

"내가 계사년(1593, 선조 26)에 남도를 오가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살피고서 그곳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관문 양쪽의 가장자리를 따라 복병을 두면 적병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서애 선생은 안동에서 문경을 거쳐 서울을 오고 갔기 때문에 이런 형세를 알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조정에서 논의 될 때 이곳 지형을 제대로 아는 관리가 없으니 당연히 일이 성사될 수가 없었다. 역사를 되짚어 어디 안타까운 부분이 한두 가지겠느냐마는 7년간의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손실을 주었기에 문경새재의 중요성은 세월이 흘러도 가슴 아픈 역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이러한 지세를 가지다 보니 한때 불과 몇 년 전 운하 건설의 핵심과 쟁점이 되는 지역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엔 가당치도 않은 소리가 지금의 시대엔 충분히 꿈꿀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이제 문경새재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쉼터 공간이다.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이름난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 문경새재를 단순하게 걷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알고 보면 실상 그렇진 않다. 수많은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해온 문경새재는, 걸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특별한 곳이다. 문경새재의 진면목은 길을 포함해 앞서 얘기했던 부분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 태종 때 조선의 중요한 관도로 확정이 되고 고비마다 한국의 역사와 함께했다. 문경새재는 일단 자연환경이 뛰어나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관문이 세 곳이나 있다. 그리고 숙박시설인 원이 곳곳에 있었고 용화사, 혜국사 등 큰 대찰들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지나갔으며 시 한 수 읊지 않을 수 없는 기가막힌 경관을 지닌 곳이다. 문경새재는 요즘 사극 촬영장의 대세이다. 한때 문경새재 3개의 관문은 세계유산 지정 논의까지 이루어진 곳이다. 문경새재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유사한 예를 찾아보기 힘든 자연유산과 인문 유산이 어우러진 곳이다.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 그곳엔 우리의 기쁨과 슬픔과 아픔의 역사가 함께 녹여져 있다. 새재길을 걷는다는 것은 지나온 온전한 역사를 온전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참모습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결국 문경새재에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이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를 체감하고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문경새재의 길을 걸으며, 당신은 어떤 역사의 순간과 마주하고 싶은가. 엄원식 문경문화예술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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