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의 대풍헌] 여름이 허락하는 느림과 멈춤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2025. 6. 2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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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삶이 너무 지치고 뜨거워질 때, 여름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 계절은 우리에게 숨 고르기를 허락한다. 올해 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6월 중순부터 중부지방엔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남쪽 해안 도시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는 이미 여름의 중심에 서 있다. 해마다 더 일찍 찾아오고 뜨거워지는 여름이 두렵다. 강렬한 햇볕과 살인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지구온난화가 초래한 기상이변이 삶을 뿌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날씨는 점점 극단을 향하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전쟁 포로처럼 선택의 여지 없이 그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며칠 전, 친구와 차를 마시던 중 그가 가만히 물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여름에 어울리는 책, 하나만 추천해 줄 수 있어?" 머릿속에 한동안 잠들어 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그곳에 오래 남아'였다. 오래전에 읽고 마음에 두었던 몇몇 문장들이 떠올랐다. 책장 한편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던 그 책을 꺼내 펼치자, 잊고 있던 감정들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도시에서는 늘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얽히는 인간관계와 넘치는 정보 때문에 우리는 쉽게 지친다. 이 책의 주인공 사카니시 도오루는 건축학과를 막 졸업한 젊은이다. 그는 유명한 노 건축가의 일을 도우며 도쿄 외곽 산속 별장에서 여름을 보낸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그는 자연 속에서 단순한 일상을 살아가며, 잃었던 삶의 속도를 천천히 되찾는다. 간결하고 사색적인 문장은 독자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해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엔 미세한 진동이 감돌기 시작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여름이 달라 보인다. 더위 속 무기력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여름은 사람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봄이 설렘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무기력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어떤 날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름날에는 멍하니 있는 순간조차 사치가 아닌 치유가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불완전한 감정들과도 화해한다.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견디는 법을 익힐 뿐이다." 삶이 가져다준 깊은 상처와 고통,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다. 정적 속 여름날의 공기는 그 감정들과 동행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소설은 건축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또 다른 통찰을 하게 한다. "건축은 기억의 그릇이다. 어떤 공간은 그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자라나는 장소가 된다." 우리는 기억 속 공간에서 정서적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나는 지금도 폐교된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면, 그 시절의 에너지가 온몸에 솟구침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나의 일부가 된 기억이다. "살아간다는 건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선택한 것을 수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자주 엉뚱한 길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수습하는 시간도 인생의 일부다. 여름은 그런 시간을 조용히 허락한다. 조금 모호해도, 조금 서툴러도 괜찮은 시간, 여름은 그 너그러움을 품은 계절이다.

격정과 속도의 시대, 여름은 느림을 허락하는 유일한 계절일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건 완벽하고 멋진 여행 계획보다 내면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해야 할 일들에서 벗어나, 고요 속에 머무는 것. 창밖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 바라보기. 우리의 삶이 생각보다 단순함을 깨닫는다. 이 느낌과 자각이야말로 여름이 건네는 귀한 선물이다. 삶은 항상 복잡하고 자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적으로 멈춰야 한다. 침묵 속에서,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마음의 리듬을 되찾아야 한다. 갖가지 욕망과 덧없는 관심에서 한발 물러나,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것, 그 고요한 순간이야말로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깊은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