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위원장의 ‘종합보고서 지침’에 자조 섞인 반응 나오는 이유 [현장에서]

“종합보고서 잘 써야겠다는 의지도, 의욕도 없습니다.”
23일 한겨레와 접촉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한 조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새로운 과거사정리법(진실화해위 기본법)이 제정돼 3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할 때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2기 진실화해위 종합보고서 작성에 참여하고 있지만 “특별한 기대감이 없어, 3기 조사관들을 위한 자료 정리와 통계 취합 정도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26일로 조사 기간이 만료되어 개별 신청사건의 진실규명(피해 확인) 심의를 모두 마친 2기 진실화해위는 오는 11월26일 활동 종료를 앞두고 그간의 진실규명 활동과 권고·평가 등을 정리한 종합보고서를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 종합보고서는 마지막 진실화해위의 ‘얼굴’이다. 이 얼굴이 제대로 만들어질 수 있을지 내부 여론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출발지점에서부터 큰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송상교 사무처장과 정영훈 조사2국장 등은 “종합보고서 작업을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별도 집행 체계가 필요하며, 위원장은 큰 틀에서 업무를 점검하고 세부사항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선영 위원장은 주요 간부회의를 주재하며 각 국별로 작성되는 종합보고서 내용을 직접 챙기려고 한다.
이는 종합보고서를 대하는 관점이 다른 탓이다. 송 사무처장 등은 종합보고서가 거시적인 내용과 방향을 담아야 한다고 여긴다. 개별 사건의 조사 결과를 취합하는 수준이 아니라 사건의 근본적 원인과 역사적 배경에 기반해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종합권고안을 제시해야 하며 이를 위해 외부 연구자도 함께하는 치열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의 지적에 대해 박선영 위원장은 지난 10일 열린 제111차 전체위원회에서 “개별 보고서와 다른 내용의 종합 보고서가 들어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선영 위원장이 지난 18일 주요간부회의에서 종합보고서와 관련해 했다는 말도 입길에 오른다. 이날 박 위원장은 국·과장들에게 “피해당사자들이 아쉬워한 부분이나 이런 권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점, 개별사건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지 쓰라”고 말했다. 일부 과장은 이를 메모해 와 종합보고서를 작성하는 조사관들에게 일일이 불러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몇몇 조사관들은 전체 방향에 대한 논의가 없는 채로 “아쉬움과 어려움을 쓰라”는 게 큰 의미 없다며 반발했다. 조사관들 사이에선 “(박 위원장은) 종합보고서가 페이스북 글모음집인 줄 안다”, “소식지에 조사 후기를 쓰라는 것 같다”, “위원장의 즉흥적인 생각을 걸러주는 사람이나 단위가 없어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종합보고서가 역사 왜곡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일고 있다. 지난달 말 진실화해위 내부망 자유게시판에는 “확정된 조사1국의 종합보고서 목차가 (지방 좌익 등) 적대 세력 사건 등 특정 사건 유형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어, 위원회의 전체 활동 성과나 실제 역사적 현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올라왔는데, 이 런 의구심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박 위원장은 진실화해위에 오기 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역대 독재자들을 찬양해온 이력이 문제 된 데다 위원장 취임 뒤엔 국회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을 과도하게 부각하려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한 조사관은 “극우적 역사관을 지닌 위원장과 국정원 대공수사처장 출신 조사1국장 아래서 과연 제대로 된 종합보고서가 나올 수 있겠나. 사무처장 등이 거시적 방향 운운한 것 자체가 무리한 욕심이었다”며 자조적 반응을 보였다.
물론 모든 조사관이 똑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기 사건을 담당하는 조사1국과 그외 인권침해사건을 다루는 조사2국 사이에 온도 차도 있다. 다만 노조를 중심으로 종합보고서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이 확산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박선영 위원장은 이런 여론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는 지난 12일 저녁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과 사진을 올려, 이날 열린 ‘종합보고서 작성 발족식’의 현장을 이렇게 전했다. “종합보고서? 내가 쓸 거다, 정도의 컨셉으로 80여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화기애애했다. 모처럼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박 위원장의 페이스북으로만 보면, 진실화해위는 하하호호 즐겁기만 하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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