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4) 신라 최초의 여왕 즉위

신라 26대 진평왕의 고민은 끝없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진흥왕의 정복전쟁으로 되돌아오는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은 나라의 경계마다 일상사처럼 되풀이되고 있었는데 이는 가장 큰 진평왕의 고민이었다.
또 크나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왕이 마흔을 지나면서 왕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새로 즉위한 왕비가 왕자를 출산했지만 결국 권력에 눈이 멀었던 대신들의 계략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왕비와 아이를 참해야 했다.

◆신화전설: 잘못된 태자
진평왕은 어려운 문제에 부닥쳐 심란할 때나 시름을 달래고, 건강을 돌보기 위한 방편으로 사냥을 즐겨 했다. 왕의 사냥에는 병부령을 따르던 눈치가 빠르고 간교한 대신 시나위가 앞장서 모든 채비를 하고, 사냥을 마칠 때까지 옆자리를 지켰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시나위를 왕은 크게 신임하고, 아주 특별하지 않은 일이라면 대부분의 결정권까지 그에게 맡겼다.
시나위는 아주 야심찬 사내였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고 용력마저 남달라 주변으로부터 크게 될 인물이라는 평을 듣곤 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었던 덕모승은 시나위의 심성을 진작 꿰뚫어 보고, "네 자신을 위해 남을 해하는 일은 부디 삼가하라"고 언질하고는 더 이상 가르침을 내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시나위는 스승으로부터 뛰쳐나와 과거에 응시해 관리가 되면서 잔꾀로 궁중에까지 진입해 야심을 키우게 됐다.

이후 진평왕이 고성숲에서 사냥에 몰두하던 어느 날, 사냥을 길게 하고는 해가 지자 시나위가 은신처로 마련해 둔 곳에서 조용하지만 걸쭉한 술자리를 마련했다. 왕의 취기가 거나해진 틈을 타 시나위는 구미애를 시켜 왕의 침소 시중을 들게 했다. 연 사흘이나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 진평왕은 결국 시나위의 계략에 말려들어 마야부인을 설득해 구미애를 후비로 맞아들였다.
시나위의 애첩이었던 구미애는 궁중에서 후궁의 몸으로 아들을 출산했다. 진평왕을 비롯한 궁궐의 모든 사람들이 경사스런 일이라며 들떠서 어쩔 줄 몰라하며 연일 잔치를 이어갔다. 드디어 아이가 돌을 지날 무렵 태자로 임명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시나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구미애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덕만의 생각과 예측은 틀린 적이 없었다. 덕만은 용춘공을 만나 조용하게 후궁과 그를 둘러싼 세력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용춘은 궐 내외에서 신망이 두터울 뿐 아니라 지혜롭고 용맹스러우며 아름답기까지 한 장군이었다. 또한 스스로 움직임이 진중하고 정의로워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용춘이 구미애의 출신과 그를 추천한 시나위까지 좁혀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했다. 덕만이 의심을 시작한 것은 왕자의 출생 시기였다. 후궁이 궁으로 들어온 시기와 아이가 태어난 날을 역산해 보면 7개월도 안되는 날이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구미애가 아버지 진평왕에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 석연찮음이 있다는 것을 예민한 덕만공주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이러한 덕만이 전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용춘공은 비밀리에 발빠르게 조사를 진행했다.
모든 것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권력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시나위가 임신한 애첩 구미애를 왕의 침소에 들게 하여 낳은 아이를 왕자, 태자로 둔갑시킨 사실이 밝혀지고, 결국 그들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스토리텔링: 아버지와의 담판
가끔 깊은 숨을 들이켰다가 땅이 꺼질 듯 내쉬는 진평왕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덕만공주는 마음이 아팠다. 덕만은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의 군주로, 성군이 되는 아버지를 섬기고 싶었다.
진평왕은 아들 아닌 아들의 죽음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면서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방법을 택하기로 서서히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다. 사위로 삼고 싶은 남자들을 물색하면서 공주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어 왕비에게 부탁했다. "공주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녀석들이 있는지 넌지시 떠보고 오세요"라며 오랜만에 마야부인에게 어색하지만 환한 웃음을 보였다.
마야부인은 공주가 좋아하는 차를 끓여놓고 먼저 첫 번째 천명공주를 불러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공주는 마음 속에 담아둔 낭이 있는가"라고 장난스레 물었다. 놀랍게도 왕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천명은 "예. 저는 용 숙부님이 좋아요. 신라에 용 숙부만한 사내는 없어요"라고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붉어지는 볼을 감추었다.
왕의 부름을 받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왕비는 "공주가 용 숙부를 좋아한다고 제입으로 말하더군요"라고 흥분된 어조로 아뢰었다. 진평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렇지 않아도 용수 형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잘되었구료"라 대답하고 이내 천명공주가 용수와 결혼한다는 방을 붙여 만천하에 공주의 혼사를 천명해 버렸다.

결국 공주들은 용수와 용춘 형제와 함께 합동결혼하는 깜짝쇼를 연출하고, 이어 신랑을 바꾸는 전략을 과감하게 단행했다. 덕만공주가 사랑을 양보하는 대신 왕위를 잇겠다는 조건을 제시해 두쌍의 부부가 합의하고 적극 추진에 나서 진평왕을 설득했다.
왕은 공주 덕만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여자라고 왕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잖아요. 제가 용 숙부 형제와 대신들의 마음을 모은다면 아버지가 원하시던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로 꾸려갈 수 있어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던 공주의 이야기가 점점 선명하게 머리에 각인이 되고 있었다.
결국 진평왕은 마음을 굳히고, 공주들과 용 형제를 불러 엄숙한 어조로 "덕만공주는 지혜로우니 너희들이 대신들을 설득하고, 국정 운영에 적극 협조한다면 왕위를 물려줄 수가 있다"며 찬찬히 반응을 살폈다.
용 형제들은 "저희들은 언감생심 왕좌에 대해 욕심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부왕의 뜻이라면 불 속이라도 기꺼이 뛰어들겠습니다"라며 굳건한 자세로 덕만공주를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천명공주도 환하게 웃으며 동생의 손을 잡으면서 후원하겠다는 말을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듯 분명한 어조로 뜻을 밝혔다.
진평왕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대신들을 하나씩 접견하면서 덕만공주의 왕위 계승 당위성을 설명하고 적극 후원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왕위를 신라 최초로 여성인 덕만공주에게 이양한다고 결정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덕만공주는 탁월한 지혜와 적극적인 성격으로 진중한 진평왕의 마음을 얻어 신라 최초로 여자의 몸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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