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도 직원도 해남産… 프리미엄 막걸리 익듯, 해남경제 무르익는다[지역을 살리는 사람들]
막걸리 좋아한 평범한 회사원
폐업 직전 100년 주조장 인수
“우리도 국격에 맞는 막걸리를”
연구소 세우고 관련서적 섭렵
‘걸쭉하고 은은한 단맛’ 입소문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 평정해
해남쌀 구입비만 연간 30억원
주조장 찾는 관광객 年 2만명

해남=김대우 기자 ksh430@munhwa.com
한눈에 봐도 걸쭉하다. 흡사 요구르트 같다. 텁텁할 것 같지만 맛을 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입안에 털어 넣으면 은은한 단맛이 치고 올라온다. 높은 알코올 도수(9∼18도)에도 목 넘김이 부드러워 자꾸 잔을 비우게 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허영만 화백 등이 ‘인생막걸리’로 극찬했다는 국내 프리미엄 막걸리 대표주자 해창막걸리 얘기다. 남도 끝자락에서 막걸리를 빚으며 국내 전통주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오병인(62) 해창주조장 대표는 “좋은 재료는 반드시 좋은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말했다. 정원이 아름다운 100년 역사의 전남 해남 해창주조장에서 최근 그를 만났다.
◇폐업 직전의 100년 주조장 인수, 그리고 독자개발= 오 대표는 과거 서울의 도시가스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워낙 막걸리를 좋아했던 그는 해남을 여행하다 해창주조장의 100년 역사와 가치를 알게 됐다. 당시 해창주조장은 경영난으로 폐업 직전이었다. 아무 연고가 없었지만 그는 지난 2007년 돌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해창주조장을 인수했다. 막걸리를 사랑했던 그는 종종 해창의 막걸리를 택배로 주문해서 먹던 단골이었을 뿐이다. “과거 주조장을 운영하던 분이 연세도 있고 운영도 잘되지 않자 술에 관심이 있는 제게 인수를 제안해와 본격적으로 막걸리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 오 대표의 설명이다.
주조장을 인수한 오 대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막걸리의 차별화였다. 막걸리는 서민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오 대표의 지론이다. 그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술이란 것도 의미 있지만, 전통주인 만큼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품격에 맞는 막걸리도 필요하다”며 “프랑스 보르도 와인과 중국 ‘마오타이’는 수천만 원에서 억대가 넘는 가격에 팔리는데 1달러짜리 술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겠는가. 특출난 막걸리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격에 맞는, 제대로 된 전통주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에서 인수 초반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도 연구소를 세웠다”고 했다.

◇해남산 찹쌀·멥쌀로 빚은 프리미엄 막걸리= 오 대표가 해창만의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선택한 재료는 ‘찹쌀’과 ‘멥쌀’이다. 기분 좋은 단맛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그는 최적의 비율을 찾기 위해 수년간 관련 서적과 자료를 닥치는 대로 뒤적여가며 오랜 연구와 시행착오를 겪었다.
오 대표는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고 단맛을 내기 위해 여러 재료를 써봤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최고의 막걸리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재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물이 찹쌀과 멥쌀을 8 대 2 비율로 섞어 자연 발효해 장기간 저온숙성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세 번 빚는 게 기본인 ‘삼양주’ 방식을 도입했다. 가장 많이 팔리는 해창 9도와 12도는 밑술에 두 번의 덧술로, 18도는 밑술에 세 번의 덧술로 빚어낸 ‘사양주’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양조횟수가 많을수록 발효 기간이 길고 알코올 도수가 높지만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해야 맛이 깊고 향이 좋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해창막걸리에서는 숙성된 과일향과 누룩향이 난다.
다만 우수한 원재료를 아낌없이 쓰다 보니 일반 막걸리보다 비싸다. 해창 9도 900㎖ 한 병이 8000원(도매가), 애주가들이 좋아하는 12도는 1만2000원, 15도와 18도는 각각 5만5000원과 11만 원에 판매한다. 쌀과 누룩에 물을 섞어 막 걸러낸 것을 서민의 술, 막걸리로 이해하는 이들에겐 다소 부담일 수 있다. 그러나 기교를 부리지 않아 투박하지만 담백한 이 술맛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막걸리 한 병이 11만 원(18도)이라니, 상식을 뛰어넘는 가격에 누가 찾을까 싶지만 이미 주당들에겐 입소문이 나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을 평정해 선봉에서 이끌고 있다. 오 대표는 “넷플릭스 요리경연대회 ‘흑백요리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프리미엄 막걸리로 소개돼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며 “신세계백화점에선 전통주 장르 매출 상위권을 차지하는 인기 브랜드가 됐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온라인 등으로만 판매하는데도 연간 매출액이 100억 원이 넘는다”고 밝혔다.
이날 해창주조장에 주차돼 있던 오 대표의 롤스로이스 세단도 프리미엄 막걸리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럭셔리 자동차의 상징과도 같은 롤스로이스처럼 최고의 막걸리를 만들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오 대표는 한때 해창막걸리 18도의 별칭을 아예 ‘해창 롤스로이스’로 지은 적도 있고, 지금도 허영만 화백의 롤스로이스 그림이 술병 라벨에 붙어 있다고 한다.
◇해남산 재료 구입비만 연 30억= 해창주조장이 성공신화를 써내려가면서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상당하다. 오 대표는 “막걸리 원재료인 유기농 찹쌀과 멥쌀은 모두 해남 땅에서 나는 것들로 재료 구입비만 연간 30억 원이 넘는다”며 “해창막걸리가 잘 팔려 생산량이 확대되면 그만큼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도 커진다”고 강조했다. 해창주조장에서 일하는 직원(12명)도 모두 이 지역 사람들이다. 오 대표는 “해남 쌀을 소비하고 고용을 창출하는 데다 국세와 지방세도 꼬박꼬박 낸다”고 말했다.
무모하다고 여겨졌던 해창주조장의 도전이 성공을 거두자 경영난을 겪던 해남지역 타 양조장들도 하나둘 이를 벤치마킹해 프리미엄 막걸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해남 옥천주조장에서 무농약쌀과 한약재로 13도 고급막걸리 황금주를 내놓았고, 해남 삼산주조장에서도 해남산 찹쌀·햅쌀과 누룩만으로 장기 발효한 삼산막걸리를 출시했다. 해창막걸리를 비롯해 해남산 막걸리는 매년 전국 전통주품평회에서 상을 휩쓸며 호평받고 있다. 오 대표는 “주조장별로 특색 있는 술을 선보이며 선의의 경쟁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전통주 발전에 기여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 2만 명이 찾는 관광지= 오 대표는 아무 연고도 없는 해남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국토 최남단 땅끝 해남은 포근하다.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다. 무엇보다 해창주조장의 100년 역사에 마음이 끌렸다. 주조장이 있는 해남군 화산면 해창마을은 바다로 이어지는 삼산천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너른 들이 펼쳐진다. ‘바다의 창고’ 해창(海倉)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곳이다.”
해창막걸리의 역사는 약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일본인 미곡상 ‘시바다 히코헤이’가 지은 살림집과 정원이 모태다. 막걸리 주조는 해방 후인 1961년 장남문 씨가 양조장 면허를 취득하면서 시작했다. 이후 전남 강진에서 술을 빚던 양조업자 황의권 씨가 벼 300섬을 주고 새 주인이 돼 30년 넘게 운영해오다 경영난으로 폐업하려던 주조장을 오 대표가 인수했다.
해남군 화산면 해창마을 1번지 해창주조장에는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과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인 곡식 창고, 정미소 터 등이 함께 남아 있다. 이 지역이 바다의 창고라는 뜻의 해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선 후기다. 당시 해남군 화산면 연곡리에 있던 조운창(조세를 한양으로 수송하기 위해 물길이나 바닷길 연안의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이 옮겨와 신해창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지금은 해창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뱃길이 막혔지만 해창주조장 앞에는 포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곡물 창고와 방앗간이 예전에 포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해창주조장의 정원은 오밀조밀하고 신비롭다. 이 정원에는 40여 종의 수목이 들어차 있다. 수선화, 천리향, 은목서, 애기동백, 목련, 상사화 등이 사계절 꽃핀다. 안마당에는 바이올린 현을 만들 때 쓰는 육박나무와 수령 700년 된 배롱나무(백일홍)가 있다. 백일홍은 벼 심을 때 꽃이 피어 벼 수확할 때까지 백일 동안 핀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정원에는 백제의 술장인 ‘수수보리(須須保利)’가 누룩으로 술 빚는 법을 일본에 전해줘 일본의 주신(酒神)으로 추앙받았다는 내용의 시가 적힌 나무 안내판이 있었다. 일본 고대 천황이 직접 읊었다는 이 시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2000년 전에도 한류 열풍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원 한편엔 연못에서 파낸 ‘황국식민의서사탑’도 있다. 이 탑은 우리의 뼈아픈 과거사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교육의 지표로 삼기 위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원 풍경과 역사적 가치 덕에 최근엔 해창주조장을 찾아 정원을 구경하고 막걸리도 사오는 게 해남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힌다. 오 대표는 “해창주조장은 술만 빚는 게 아니라 해남을 알리는 역사적 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다”며 “해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해창막걸리를 시음하기 위해 주조장을 찾는 관광객이 2만 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해창막걸리가 국내 전통주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자 오병인 해창주조장 대표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중국의 명주 ‘마오타이’나 ‘수정방’을 뛰어넘는 최고급 증류주로 세계 시장을 두드리겠다는 게 그의 새로운 목표다.
이를 위해 오 대표는 올해 초, 설 명절을 앞두고 증류식 소주인 ‘해창대장경’을 출시했다. 당연히 해창대장경이란 제품명은 팔만대장경에서 따왔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자 오 대표는 “우리나라에 소주를 전파한 게 몽골군이고,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것이 팔만대장경”이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증류주로 세계 주류시장에서 중국 술을 꺾겠다는 의미에서 해창대장경이라고 지었다”고 답했다.
이런 설명에 걸맞게 해창대장경은 처음부터 해외시장 진출용으로 개발됐다. 생막걸리는 유통기한이 짧아 외국으로 수출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에 프리미엄 증류주로 눈을 돌려 탄생시킨 게 해창대장경이다. 10년 연구 끝에 개발한 해창주조장의 역작이다.
오 대표는 “해창대장경으로 면세점에 입점하고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에 진출해 우리 전통술의 우수성을 알릴 것”이라며 “오랜 기간 연구한 주조기술과 노하우로 해창막걸리를 국내 유명 브랜드로 키워냈다. 이제는 해창대장경을 수출해 우리나라 전통주 산업 발전을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해창대장경은 현재는 신세계백화점 서울 명동·강남·타워팰리스점과 대구·광주점 등에서 판매 중이다.
글로벌 명품 술 시장을 겨냥한 제품답게 해창대장경의 가격표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해창대장경 세트의 가격은 무려 5050만 원이다. 82도 750㎖ 한 병(사진)이 2050만 원이고, 나머지 3000만 원은 50돈(24K) 금잔 값이다. 오 대표는 “이 술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숙성을 하지 않아도 찹쌀의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고 풍미가 강하다”며 “82도의 높은 도수에도 목 넘김이 부드럽다”고 설명했다.
오 대표에 따르면, 11만 원짜리 해창막걸리(18도) 60병을 증류해야 해창대장경 82도 한 병을 얻을 수 있다. 다만 대중도 해창대장경을 접해볼 수 있도록 도수가 낮은 25도(375㎖)와 45도(375㎖)는 각각 5만5000원과 10만5000원에 판매한다.
김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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