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국’ 제시한 이재명 정부…“창작기반 강화 정책 힘써야”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취임 선서 뒤 연설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던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을 언급하며 “문화가 꽃피는 문화강국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적극적인 문화예술 지원으로 콘텐츠의 세계 표준을 다시 쓸 문화강국, 글로벌 소프트파워 5대 강국으로 도약할 것”이라고도 했다.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는 지난 18일 문화체육관광부 업무보고에서 케이(K)컬처 시장 300조원 시대, 문화 수출 50조원, 글로벌 소프트파워 빅5 등을 이 대통령 임기 내 달성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최근 한국 문화예술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케이팝, 케이무비, 케이콘텐츠, 케이클래식, 케이문학, 케이뮤지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장기적 발전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각 분야에선 무엇보다 ‘기초 체력’을 탄탄히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창작 기반과 허리 탄탄해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와 미국 아카데미상을 석권하는 성과를 냈지만, 요즘 한국 영화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극장 관객 수가 20년 전 수준으로 후퇴하고, 수익성이 떨어지자 투자자가 떠나고, 영화 제작이 줄면서 극장에 걸 영화가 없어지고, 관객들이 극장을 찾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 김대중 정부의 영화진흥위원회 설립, 노무현 정부의 영화발전기금 조성이 위기 돌파와 도약의 발판이 됐던 것처럼, 지금 요긴한 정책을 꼽으라면 영화계에선 중예산 영화 제작 지원 확대를 든다. 투자·배급·상영으로 수직계열화된 대기업 의존도를 낮추고, 양극화된 시장을 개선하며, 당장 부족한 개봉 편수를 늘리자는 취지다.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는 올해 영진위가 새로 시작한 100억원 규모의 중예산 영화 제작 지원 사업을 연간 300억원으로 늘려 5년간 집행해달라고 요청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반토막으로 줄인 독립영화 제작과 영화제 지원 예산을 복구하는 것도 시급하다. 중예산 영화 지원 사업이 당장 급한 불을 끄는 데 필요한 긴급 조치라면, 독립영화와 영화제 지원은 무너지는 한국 영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장기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영화인들의 주장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문체부의 심부름꾼 수준으로 전락한 영진위의 쇄신 또한 절실하다.
드라마·예능 등 국내 콘텐츠 업계는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과거에는 방송사가 주축이었다면 이제는 넷플릭스 등 오티티(OTT)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런 현실과 맞물려 오티티도 방송통신발전기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래야 콘텐츠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헌율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방송사 콘텐츠가 오티티에서 유통되고 오티티 콘텐츠도 방송사를 통해 공개되는 등 플랫폼 간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며 “과거처럼 방송통신발전기금이 들어간 콘텐츠를 방송사만 이용하는 게 아닌 만큼 공동 부담하고 기금 규모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 강화도 필요하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장은 “콘텐츠 산업이 국가 전략 산업이 되면 세제 혜택을 받는 데 더욱 유리해질 수 있다”며 “문화 콘텐츠 사업을 연구·개발(R&D) 분야로 인정해 관련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헌율 교수는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산업이 성장하려면 정부가 중소 제작사를 지원해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도록 도와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중음악계에선 당장 공연장 부족 문제를 꼽는다. 대규모 공연장으로 활용해온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이 2023년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연쇄적으로 대형 공연장 기근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 대통령은 대선 공약에 수도권 5만석 규모 대형 아레나 구축을 넣기도 했다. 신규 건설의 강력한 후보지로 경기 고양시 옛 씨제이(CJ)라이브시티 부지가 거론된다. 씨제이가 건설 중인 시설의 기부채납 의사를 밝히면서 경기도는 새로운 사업자를 찾고 있다. 일각에선 이를 국가 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케이팝이 주목받는 상황에서 한편으론 개성과 다양성을 근간으로 한 인디음악계에 대한 지원책도 반드시 필요하다.
미술을 비롯한 시각예술 쪽에선 지난해 시행된 미술진흥법을 작가 창작 기반 강화란 측면에서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진일보한 요소도 있지만, 화랑업체와 아트페어 등 시장에 편향된 법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 기획자, 이론가 등의 창작·연구 기반 확충에 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나온다. 중견 기획자 ㄱ씨는 “케이팝으로 대표되는 대중문화가 약진하는 데 비해 케이아트로 통칭되는 시각예술 분야는 콘텐츠 경쟁력이 약한 것이 현실”이라며 “거래 유통 구조에만 주안점을 둔 시각을 벗어나 가능성 있는 창작 비평 프로젝트와 미술 아카이브 재구성 작업에 전폭적인 정책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보장해야
문화예술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이 이전 정부에선 훼손되기 일쑤였다. 박근혜 정부에선 봉준호, 송강호, 김혜수 등 영화인들을 대거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윤석열 정부 들어 영진위는 2024년 차세대 미래관객 육성사업을 추진하면서 입찰 공고에 ‘정치적 중립 소재와, 특정 이념·사상을 배제한 영화 및 교육 프로그램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조건을 넣어 블랙리스트의 부활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음악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가수 이승환은 12·3 내란 사태 때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무대에 올랐다는 이유로 김장호 구미시장에 의해 경북 구미 공연을 취소당했다. 하림도 같은 이유로 정부 주최 행사 출연을 취소당해 파장이 일었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과 대구문화예술회관이 홍준표 당시 대구시장 이미지를 썼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선정한 청년 작가들의 전시장을 폐쇄하는가 하면,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이 전시 도록에 싣기 위해 요청한 평론가의 글에 계엄령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게재하지 않겠다고 통고해 검열 논란이 확산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의 재발을 막고자 2022년 정부가 예술인권리보장법을 시행했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검열’ 논란 사태가 벌어져도 예술인권리보장법에서 규정한 대로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가 직권 조사와 조치 등으로 적극 대응한 사례는 사실상 전무했다.
블랙리스트 검열 사태 당시 조사 활동에 관여했던 공연예술계의 한 관계자는 “지자체에서 지역 문화예술계에 대한 검열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윤석열 정권 들어 선임된 예술인권리보장위원회는 이런 현안들을 외면하면서 존재감 없는 기구가 돼버렸다”고 꼬집었다. 이에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원칙을 되돌릴 수 없는, 실효성 있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서정민 기자, 문화팀 종합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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