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무성한 항일 공적비…지도에도 없는 유령시설로

최현정 2025. 6. 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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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공적 새긴 ‘충의현비’
남궁억·송완식 선생 추모비
비석 곳곳 거미줄·이끼 가득
한자 설명에 이해도 떨어져
애족장 추서 유봉석 의병 묘소
안내판 커녕 철조망 ‘출입 불가’
항일 유적지 잘못된 위치 정보
청소년 동아리서 지도 제작도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 18 방치된 현충시설…잊힌 영웅들

▲ 지난 20일 찾은 춘천시 신동면 팔미리. 고 유봉석 의병의 묘소로 향하는 길이 따로 마련돼있지 않아 잡풀을 헤치고 가야 한다.

후대와 독립을 위해 스러진 이들이 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곳곳에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영웅의 존재는 희미해져가고 있다. 많은 현충시설이 무성한 잡초 속에 수년째 방치되고 있어서다. 애써 현충시설을 찾아 나서려고 해도 표지판이 없거나 지도에 제대로 표기돼 있지 않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항일운동 유적지는 행사 때만 반짝 조명된다.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운 곳도 있다. 강원도민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잊힌 도내 현충시설과 현충시설로 지정되지 못한 채 수년째 잊힌 영웅의 공간을 찾아 실태를 점검했다.

▲ 춘천 학생 동아리 ‘어색한 사이’ 멤버들

■ 영웅의 추모비가 잊혀가는 이유

지난 20일 춘천시 서면 후동리 소주고개길 인근. 춘천 항일의병의 대표 인물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충의현비’를 이찬해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과 함께 찾았다.

‘충의현비’는 우리나라 항일의병의 대표 인물이자 춘천을 대표하는 의병장인 의암 류인석 선생과 유홍석 의병장, 여성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윤희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다. 1989년 3월 1일 광복회 강원도지부가 항일의병들의 희생과 공적을 잊지 않기 위해 춘천시의 지원을 받아 건립했다.

그러나 비석 곳곳에는 거미줄과 이끼가 끼어있었고,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이 비석 일부를 가리고 있었다. 영웅을 기리기 위한 공간은 그렇게 수년째 잊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국가보훈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현충시설이지만, 주변에 이를 알리는 어떠한 표지판도 없었다. 지도에는 위치도 제대로 표시돼있지 않아 전문가와 함께하지 않는 이상 찾기가 어려웠다. 처음 이곳을 찾는 사람으로서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무슨 이유로 마련됐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추모비에 건립 이유와 공적이 자세히 적혀 있었지만, 대부분이 한자로 쓰여진 탓에 한자를 잘 모르는 일반인이 비석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아보였다. 충의현비 맞은 편에 세워진 한서 남궁억 선생과 그의 제자 송완식 선생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한글이 있었지만 대부분이 한자였고,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한글로 적힌 비석은 6·25 전쟁 당시 소주고개에서 일어난 한 모자의 사연을 담은 비석이었는데, 해당 비석 역시 안내판이 따로 마련돼 있지는 않았다.

사연은 이랬다. 6·25 전쟁 중 소주고개를 넘다 인민군에게 발각된 청년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가 그를 감싸다 인민군들에게 대신 짓밟혀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춘천시는 모자의 애환이 담긴 사연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유지를 이어가고자 해당 터에 1994년 5월 8일 비석을 건립했다.

이찬해 광복회 강원도지부 사무국장은 “이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줄 나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사연을 알면 얼마나 감동을 받겠느냐”며 “한서 남궁억 선생, 류인석, 윤희순 의병장 역시 강원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데 이 분들의 추모공간에 표지판 하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 춘천시 남면 후동리에 위치한 충의현비. 주변에 어떠한 설명문과 안내판도 없이 홀로 세워져 있다.

■ 가는 길 막히고 잡풀에 가려지고… 방치된 영웅의 묘소

이날 춘천 출신의 유봉석 의병이 묻힌 묘소도 찾았다. 1896년 류인석 의병장이 이끈 호좌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그는 류 의병장을 따라 중국 선양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 춘천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의병 투쟁을 벌였다. 국가보훈부는 그의 이러한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영웅의 묘소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춘천 신동면 팔미리의 종중 땅에 자리한 그의 묘소 역시 표지판이나 안내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은 묘소로 향하는 산 입구도 철조망으로 된 문으로 막혀 있어 할 수 없이 빙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사방이 사유지라 따로 길이 마련돼 있지 않은 탓에 인근 가게의 텃밭 길을 통해 산을 올라야 했다. 텃밭을 지나 사람 키만한 잡풀들을 헤치고 어렵게 산을 올랐지만, 금세 또 다른 철조망이 앞을 막아섰다. 고라니, 멧돼지 등 짐승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된 철조망이었다. 철조망 사이로 묘소 옆 비석이 조그맣게 보였지만, 철조망에 가로막혀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잡풀과 철조망은 영웅의 묘가 얼마나 오랜 기간 방치돼있었는지 짐작게 했다.

▲ 춘천시 남면 후동리에 위치한 남궁억 선생과 제자 송완식 선생을 기리는 추모비. 안내판이나 표지판 없이 무성한 잡풀들 속에 방치돼 있다. 최현정 기자

■ 항일운동 유적지 찾아 삼만리… 출입 안 되기도

항일유적지 역시 찾다가 도중에 포기하거나 행선지를 바꿔야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2022년부터 춘천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 환경정화 활동을 벌여 온 초·중·고 학생 동아리 ‘어색한 사이’ 멤버들도 이같은 일을 겪었다.

이들은 지난 2022년 광복회 강원도지부 행사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을 계기로 항일유적지와 현충시설을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도만 보고 해당 지역을 찾았다가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출입 제한에 막혀 행선지를 바꿔야 하는 경험을 했다. 이에 춘천시 자원봉사센터의 지원을 받아 춘천의 주요 항일 유적지들을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는 지도를 제작했다.

동아리 ‘어색한 사이’의 고상진 대표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가 있기도 하고, 따로 검색을 하지 않더라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도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만들게 됐다”며 “일반인이다보니 자료 요청을 하는 것도 오래 걸리고, 접근에 한계가 있어 영상 촬영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해당 지도가 유용하게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관심도 문제다. 광복회 강원도지부 역시 강원도의 주요 독립운동 유적지를 소개하는 홍보 자료와 독립운동 관련 책자를 만들어 학교들에게 공문과 함께 배부해왔지만,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관심을 보이는 몇몇 학교를 제외한 대부분이 도서관 한 쪽에 책자를 방치해둔 탓에 학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최현정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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