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큐알코드와 동행하는 시인의 시대 [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오랜만의 중국 방문이었다. ‘한중시인회의: 코로나 이후의 시문학과 국제교류’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행사는 중국 난징대학 한국학과 쉬리밍(徐黎明) 교수와 멍이페이(夢亦非) 시인, 한국의 이병률 시인이 주축이 되어 기획된 문화 교류였다. 행사가 열린 곳은 중국 서남부 구이저우성이었는데, 산첩첩 물첩첩인 곳임에도 놀랍도록 발전해 있었다.
먼저 놀란 것은 시인들의 소통 방식이었다. 십년 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명함을 건넸을 때 중국 시인들은 명함 대신 휴대전화 큐알(QR)코드를 내밀었다. 명함에 더해 친구 맺기가 가능했다. 중국에서는 구걸도 큐알 코드로 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실제로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네이버페이, 배달의 민족 등을 다 합쳐 놓은 위챗으로 모든 게 가능했다.
작품집이나 행사 자료집도 없었다. 행사장에는 사진과 약력, 큐알코드가 병기된 참가 작가들의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큐알코드를 스캔하면 해당 작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포스터를 사진으로 찍어서 저장하면 언제든 클릭해서 열어볼 수 있었고, 인공지능(AI)에 의한 번역도 가능했다. 번역이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낭송과 함께 들으면 의미와 감동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엉뚱한 번역문이 시적으로 들리기도 해 즐거움을 더했다.
또한 만찬, 세미나, 시낭송, 출판기념회, 답사 등 기본 틀만 있을 뿐 참가자나 작품 등 세부적인 순서는 자유로웠다. 날씨나 진행 속도, 참가자 수에 따라 현장 상황에 맞게 진행되다 보니 다음 행사는 현재 진행 중인 행사가 끝나고 공지되었다. 시 낭송도 그랬다. 큐알코드 속 준비된 작품들을 낭송하기도 하고, 현장에 어울리는 고전 작품이나 다른 시인들의 시나 즉흥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시인 아닌 사람들도 자유롭게 참여했다. 즉흥적으로 서로의 시에 대한 짧은 소감이나 평을 덧붙이기도 했다.
통역자가 있었으나 참가자들은 각자가 가진 인공지능 번역·통역 앱이나 기기를 활용했다. 한 작가의 출판기념회는 이렇게 진행됐다. 행사장에 도착해 새로 출간된 소설을 받고 이틀 동안 틈틈이 읽은 뒤 참가했는데, 누군가는 준비된 학술적 비평을, 누군가는 인상적 비평을 자유롭게 이어갔다. 나도 부리나케 인공지능 번역에 힘입어 짧은 소감을 발표했다. 또한 그때그때의 행사 사진과 동영상은 큐알코드를 통해 참가자는 물론 참가하지 못한 다른 관계자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다.
서울과 홍콩, 베이징을 비롯해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은, 시인이 대부분이기는 했으나 소설가, 비평가, 학자, 가수도 있었다. 참가자 모두가 자신의 언어로 발화하면서 서로의 시에 호응했다. “우리의 달이 이태백의 달보다 더 밝을 수 있을까”라는 현대 시인들의 고뇌를 전할 때, 백거이의 장한가를 줄줄이 암송할 때, 그 암송을 또 몇몇이 따라 낭송할 때, 지금의 시를 지탱하는 과거 시의 힘이 느껴졌다. 시의 생활화, 시의 진심이라고나 할까.
중국에서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상호 감응하는 그 능력이 바로 시인으로서의 재능이라고 했다. 시를 향유하는 깊이와 순발력에 따라 시인이냐 아니냐가 판별되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러니 시인 간 교류는 시인으로서의 자웅을 겨루는 일종의 ‘시인대회’인 셈이다. 행사의 매 순간이 기대되고, 매 순간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렇게 참가자들 모두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은 행사 뒤에 정리되어 자료집으로 남겨진다고 했다.
만찬에 초대된 묘족의 전통연희에서도 시흥(詩興)의 기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노래와 춤과 술로 환대하고 흥을 돋우고 감정을 나누고 공감했다. ‘구이저우’ 마오타이주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 한가운데 시가 있었다. 시의 강강술래를 돌며 과거와 미래가, 묘족과 한족과 한민족이, 시와 노래와 춤이, 유명 시인과 무명 시인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런 소통이 가능했던 건 인공지능 덕분이었다. 큐알코드를 통한 정보 공유와 전달, 동시통역과 번역, 원거리 소통, 그 중심에 인공지능이 있었다. 첨단 문명의 이기 덕분에 가장 전통적인 ‘시의 본래됨’에 집중할 수 있다니! 그러니 사흘 동안의 ‘시인대회’에서 내가 체험한 건 ‘인공지능 시대, 시의 새로운 소통 방식’이었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는 이 시대에 인공지능을 활용해, 시간과 언어와 국가와 인종을 넘어서 시라는 매개를 통해 모두가 함께 시를 만들어가는 시의 새로운, 아니 오래된 소통 방식이었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새벽까지 흥성스러웠던 ‘시 경연’ 아니 ‘시 배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시의 시대였던 1980년대 어느 밤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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