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2. 하늘에 있는 지아비를 그리며 64년의 오매불망 사릉(思陵)

하인수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2025. 6.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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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을 그리워하며 일생을 보낸 비운의 여인, 정순황후
사릉 전경(궁능유적본부)
조선시대 모든 능역(陵域)에는 사가(私家)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思陵) 능역에는 사가 무덤 10여 기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사릉 전면
문종 승하 후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의 국상 중인데도 왕실의 대통을 이어야 한다며 단종의 혼인을 서둘렀다. 단종이 14세, 왕비는 송현수의 딸로 단종보다 한 살 많은 15세였다. 이미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은 송현수 가족사의 불행을 예감하고 있었다. 여산 송씨 송현수 집안은 인척이었던 기황후로 인해 그들의 신분이 복원되었지만 고려 말 충렬왕과 충선왕의 권력 싸움에서 패해 노비로 전락하는 풍파를 겪었고, 다시 세조에 의해 집안이 두 번째 노비로 전락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게 된 것이다. 왕비가 되자마자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심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고, 12살에 즉위한 단종은 즉위 3년 2개월 만에 살기 위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살에 상왕이 된다. 그때 왕대비 정순왕후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단종 복위 운동으로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17세에서 죽임을 당하자 노산 부인으로 폐서인이 되고 정순왕후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다.
홍살문

노산부인과 관련된 기록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지만,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에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청계천 영도교 인근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는데, 이 시장의 유래도 정순왕후에 얽힌 것이라고 한다.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여인네들이 정순왕후의 집에 끼니거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자 여인들은 꾀를 내어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여자들만의 작은 채소 시장을 열어 채소를 파는 척하면서 먹을 것들을 모아 정순왕후에게 몰래 가져다주었고, 이것이 후에 현재 영도교 인근에 생긴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순왕후 송씨는 주변의 도움도 받으면서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천을 물에 넣자마자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전해지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다른 야사에서는 현재 종로구 창신동에 소재하는 청룡사라는 절로 출가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정순왕후는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후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아들이자 정순왕후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정미수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그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조선 역대 임금 중(추존 제외) 첫 번째로 단명한 남편 단종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역대 왕비 중(추존 제외) 가장 장수한 왕비다. 지아비 단종의 죽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요절, 세조, 예종, 성종의 시대를 거쳐 연산군의 폐위, 세조의 증손자인 중종의 반정 즉위까지 모두 보고 죽은 것이다.

중종 대에 와서야 비로소 노산 부인 송씨에게 소찬을 진배하고 시비(侍婢)가 먹을 것을 주기도 하였지만, 모진 세월을 살았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대군 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 6월 6일)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시가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고, 해주 정씨 가족 묘역 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했던 것이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에는 시조카이자 양자였던 정미수의 집안인 해주 정씨 가문에서 묘를 관리해 주었다. 지금도 사릉 능역은 해주 정씨의 문중 산이자 사릉 능역이기에 해주 정씨 집안의 개인 묘들이 들어서 있는 이유인 것이다.
사릉 후면

사릉(思陵)은 한북정맥에 속하며 천마산에서 들어온 내룡맥이 남양주 광해군묘를 지나 기복(起伏)을 거듭하면서 국(局)을 형성한 곳이다.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어 묘를 조성하였고, 사후 170여 년이 지난 숙종 때(1698년, 숙종 24)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석양과 호석도 한 쌍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아 전체 건물이 정(丁)자형보다는 정사각형 모습의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