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사상륙작전 학도병’ 이기일 전 무공수훈자회 옹진군지회장

조경욱 2025. 6. 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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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험하다는 소식에 참전 16살 학도병
인천상륙작전 위한 밑바탕 장사상륙작전
급하게 구성된 인원들 군번·계급도 없어

장사상륙작전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기일(92)씨는 이후 현역병으로 전환해 ‘저격능선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씨와 함께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학도병들에게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2025.6.13 /조경욱기자 imjay@kyeongin.com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인천시 옹진군지회장을 지냈던 이기일(92)씨는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학도병이다. 옹진군에서 생존해 있는 단 2명의 무공수훈자 중 1명이기도 하다.

황해도 벽성 출신인 그는 1949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동생과 함께 서울에 왔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졌고 동생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가 경남 밀양까지 내려왔을 때 국군에서 모집 중인 학도병에 들어갔다. 나라가 위험하다는 소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당시 이 전 지회장이 들어갔던 부대는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다. 대대장 이명흠 대위가 대구와 밀양에서 모은 학도병 718명(추정치)으로 부대가 구성됐다. 이 전 지회장은 “기초적인 제식훈련을 한 주도 채 안 받고 부산으로 떠났다. 학도병마다 입대 날짜가 조금씩 달랐다”며 “이후 부산으로 이동해 3~4일 더 훈련을 받고 출항했다”고 회상했다.

경북 영덕 장사리 해변에서 1950년 9월 15일 이뤄진 장사상륙작전은 같은 날 진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기만 작전이었다.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켜 인천상륙작전에 집중되는 북한 병력을 줄이기 위한 목표였다.

먼저 상륙 시도한 중대 중 절반 과정서 전사
미국 해군 지원 포격과 함께 200고지 탈환
부산항으로 복귀한 다음에도 현역병 전환
정전협정 체결 이듬해 1954년 군에서 제대

자신들의 이용 목적도 몰랐던 학도병들은 당시 부산에 도착한 후 머리카락과 손톱 일부를 잘라 봉투에 넣어 부대에 제출했다. 이틀 정도가 지난 1950년 9월 13일 출동 명령이 떨어졌고, 학도병들은 다음날인 14일 오후 2시께 부산항에서 ‘문산호’(2천700t급)에 올라탔다. 출정식과 함께 학도병들에게 백설기가 1개씩 돌아갔다. 승선인원은 학도병 718명과 선원, 현역군을 포함해 모두 772명이었다. 이들에게 나흘치 식량인 미숫가루 3봉지와 수류탄 2개, 탄약 300발이 지급됐다. 총기류는 ‘카빈 소총’부터 일본식 ‘99식 소총’, 노획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식 기관단총 등 다양했다. 그만큼 급하게 구성된 부대였다. 15~19살 소년들 구성된 학도병에게는 군번도 계급도 없었다.

당시 이 전 지회장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그는 화기중대인 5중대에 속했다. 학도병은 1~5중대로 나눠졌는데 4중대는 숫자 ‘4’가 들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 전 지회장은 기억했다. 그는 “훗날 생각해보면 5중대에 지급된 박격포와 기관총도 인민군이 쓰던 것과 같았다. 아마 노획한 것을 우리에게 준 것 같다”며 “목적지도 모른 채 배가 출항했다. 누가 ‘쓰시마’(대마도)를 지난다고 해 처음에는 일본에 훈련을 받으러 간다는 소문이 배 안에서 퍼졌다”고 했다.

학도병들의 기대와 달리 문산호는 포항 북쪽 25㎞ 지점인 장사리 해변으로 향했다. 북한군의 점령지였다. 당시 일본 규슈 앞바다에서 동해상으로 지나가는 태풍 ‘케지아’(Kezia)의 영향으로 기상 환경이 좋지 않았다. 배가 심하게 요동쳤고 모든 학도병이 멀미로 구토를 했다. 문산호는 출항 이튿날인 9월 15일 오전 4시께 장사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높은 파고에 해변까지 도달하지 못했고 암초 위에 좌초됐다. 선원들이 모래사장까지 헤엄쳐 가 나무에 밧줄을 묶었다. 육지까지 이어진 밧줄을 붙잡고 두 개 중대가 먼저 상륙을 시도했다. 이 전 지회장은 “앞서 나간 중대 중 절반이 이미 상륙 과정에서 죽었다. 그걸 보고서도 뒤따라 밧줄을 타고 해변으로 갔다”고 회상했다.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인천시 옹진군지회장을 지낸 이기일(92)씨는 1950년 9월 15일 장사상륙작전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2025.6.13 /조경욱기자 imjay@kyeongin.com

마지막 소원은 전사자와 가족에 합당한 대우
718명중 제대 확인되는 인원은 180명뿐
문산호 선원에 훈장 수여와 달리 혜택 없어
“학도병 명예 찾고 가족들 자부심 갖길 바라”

이 전 지회장이 속한 5중대도 뒤따라 밧줄을 잡고 해변으로 향했다. 밧줄을 타고 빠르게 내려가며 손이 다 까졌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뜨겁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 전 지회장은 중간에 밧줄을 놓쳐 바다에 떨어졌다. 배낭이 물에 젖으며 몸이 무거워졌다. 1~2m를 앞으로 헤엄쳐도 파도가 한번 치면 3~4m씩 뒤로 밀려났다. 배낭을 버리고서야 겨우 해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손에 쥔 소총은 모래가 들어가 작동하지 않았다. 마침 미국 해군의 구축함에서 지원 포격이 쏟아졌다. 이 전 지회장은 “해변에 도달했을 때가 아침 8시쯤이었다. 배낭은 물속에 있고 들고 있는 총도 작동이 안 돼 버렸다”며 “포격이 끝나고서 버려진 다른 총을 주워 목표인 ‘200고지’를 탈환했다”고 했다.

학도병들은 200고지 점령 후 대열을 정비하고 근처 271고지까지 탈환했다. 하지만 상륙 이틀이 지난 17일부터 북한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의 추가 병력이 밀려왔다. 이들을 이끌던 이명흠 대위는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다시 장사 해변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타고 온 문산호는 이미 좌초돼 이용할 수 없었다. 19일 오전 조치원호가 학도병들을 태우러 도착했지만 해변에 접안을 못했다. 학도병들은 다시 배와 이어진 밧줄을 잡고 헤엄쳤다. 미 해군의 포격 지원이 있어 상륙보다는 퇴각이 수월했다. 하지만 학도병 전원의 승선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물 때가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일부를 남긴 채 배가 떠났다. 이 전 지회장은 “당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몸만 배에 타라고 했다”며 “훈련도 제대로 못 받은 학도병들이 ‘로프’를 잡고 배까지 얼마나 빠르게 갈 수 있겠나. 결국 40~50명 되는 인원은 승선을 하지 못하고 배가 출발했다”고 했다.

이 전 지회장은 부산항으로 복귀한 다음에도 현역병으로 전환해 각종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 이듬해인 1954년 6월에서야 군에서 제대했다.

이 전 지회장의 마지막 소원은 당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해 전사한 학도병과 그 가족들에게 합당한 대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 전 지회장이 1970년 국방부에 요청해 받은 문서에서는 학도병 718명 중 제대가 확인되는 인원은 180명뿐이다. 나머지는 전사·실종·결번·불명 등으로 분류됐다. 이들의 명단은 남았지만 학도병 지원 당시 제출한 집주소 등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는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이 부산항을 떠나기 전 냈던 손톱과 머리카락 봉투도 사라졌다.

이 전 지회장은 “자신의 가족이 학도병으로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했다는 것을 모르는 유가족이 아직도 많다”며 “학도병들은 사실상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부족했다”고 했다. 특히 해군에서 지난 2019년 문산호 선원 11명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한 것과 달리 육군은 학도병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다. 이 전 지회장이 받은 화랑무공훈장은 장사상륙작전이 아닌, 현역병 시절 ‘저격능선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주어졌다. 이 전 지회장은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도 이제 몇 안 남았다”며 “산 사람들은 그래도 이름이 기억되지만 전투에서 죽은 학도병들은 유골조차 찾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 과거 함께 했던 학도병들이 훈장이라도 하나 받아 명예를 찾고, 그 가족들이 학도병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길 바란다”고 했다.

/조경욱 기자 imja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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