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넓은 집에 살기 싫어요” [단편선과 플리들]
밤이었다.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두고, 음악을 틀어둔 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집중하던 손을 멈춘 건, 문득 귀에 걸린 한 곡 때문이었다. 곧, 나는 조금 울었다. 노래는 우희준의 ‘넓은 집’이었다. 그는 “나는 넓은 집에 살기 싫어요/ 그게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요”라고 노래했다.
담긴 이야기는 내밀하고도 과격하다. 기쁘지만은 않은 섹스, 포개어 실려 다니는 학생들, 어쩐지 부끄러운 일을 벌인 사람들 같은 이미지들이 초현실적으로 교차한다. 곡의 말미에서 ‘살기 싫은’ 대상은 넓은 집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슬그머니 옮겨간다. 우희준은 “나 이제 이 몸에 살기 싫어요”라고 말하며 곡을 마친다. 그것은 어쩐지 자기혐오처럼 들린다.
눈물이 난 것은, 아마 나 역시 그런 자기혐오의 시간을 지나온 적이 있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나요?
우희준은 갓 데뷔한 신인이다. 〈심장의 펌핑은 고문질〉은 그의 데뷔 앨범이다. 커버 이미지는 화장실에서 찍힌 듯한,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모호한—어쨌든 일그러진 여성의 얼굴이다. 그리고 음반의 제목은 ‘심장의 펌핑은 고문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고문질’이라는 조어 때문일까. 어쩐지 키치하고 가벼운 음악일 것 같다는 선입견으로 음반을 듣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가볍다. 다만 여기서의 ‘가벼움’이란, 부러 진지한 척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대개의 작가주의 음악이 음악적·예술적 진지함을 구현하기 위해 정돈되고 깊이 있는 ‘모던함’을 지향한다면, 우희준의 음악은 ‘포스트’하다. 채워져 있다기보다는 여백이 많고, 정교함보다는 느슨함과 자유로움이 우선된다.
앨범에 담긴 아홉 곡은 대략 반은 인디록, 반은 포크처럼 들린다. 물론 장르적으로 인디록이나 포크를 추구한다기보다, 자기 스타일과 태도를 눈치 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사운드는 인디록처럼, 내밀한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포크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베이스와 대부분의 드럼을 우희준이 스스로 연주했고, 여러 연주자가 초대되어 분방한 색감을 만들어냈다. 노래에는 꾸미거나 뽐내려는 의도가 없다. 그저 목에서 나오는 대로 부른다. 그래서 마치 동네 친구가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게 또래 한국 여성들의 평범한 목소리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정겹고, 때로는 히스테릭하다.
이 모든 요소가 어딘가 이상한 방식으로 뒤섞이며, 우희준만의 고유한 무드를 만들어낸다. 그는 앨범 소개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앨범에서 저는, 자주 웃으며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제 삶은 죽음에의 충동과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요. 하지만 여러분, 수치심은 우리네 몸이 미치도록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웃음’과 ‘죽음’, ‘수치심’과 ‘살아 있음’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짝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장의 펌핑은 고문질〉에서는 그런 것들이 거리낌 없이 한데 놓인다. ‘웃음’과 ‘죽음’을 평범한 목소리로 함께 전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것들은 태초부터, 언제나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우희준의 음악은 굳이 나누자면 ‘특수’한 쪽에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실은 ‘보편’적인 삶을 향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또는 ‘자기들’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지난 5월 초, 서울 북아현동의 카페 ‘침묵’에서 〈심장의 펌핑은 고문질〉 감상회가 열렸다. 스물몇 명이 모였고, 모두가 숨죽인 채 함께 앨범을 들었다. 처음 본 우희준은 외향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고유한 방식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감상회가 끝난 뒤 공간을 둘러보니 그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많았다. 특이한 것은, 인디 신에서 막 활동을 시작한 신진 음악가들도 꽤 보였다는 점이다. 서로 친구라도 해주려는 것일까. 그건 언제나 좋은 일이다. 새로운 신은 언제나, 모인 여럿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단편선 (음악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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