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컷’의 경계…좋음이 끝나고 싫음이 시작되는 [.txt]
‘싫다’에 ‘-껏’이 결합해 의미 뒤집혀
‘좋을 만큼’ 가되 ‘싫도록’ 안 넘어야
적정선 알기 어렵다는 게 인간 슬픔

우리가 지금 쓰는 말들은 한눈에 어원이 안 보여도 차근차근 파헤치면 그 흔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달리다’는 언뜻 단일어로 보이지만 원래는 ‘닫다’(뛰어가다)의 사동사라서, ‘내닫다’나 ‘치닫다’, ‘달아나다’ 따위와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실컷’도 ‘마음껏’, ‘한껏’, ‘양껏’처럼 ‘싫다’에 ‘-껏’이 결합한 얼개다. 즉 ‘싫을 때까지’ 또는 ‘싫도록’이 ‘마음껏’(마음에 들도록)이라는 의미로 뒤집힌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보다는 좋음이 끝나고 싫음이 시작하는 경계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실컷’의 단독성은 ‘컷’이라는 발음 때문이기도 하고 흔히 뒤따르는 동사가 ‘실컷 먹다/놀다’이다 보니 ‘실컨’으로 발음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 반면, ‘껏’으로 끝나는 말은 그렇게 발음하는 경우가 드물다. ‘실컨 자다’는 종종 보이지만 ‘마음껀 자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원이 합의된 ‘실컷’과 달리, 이런 경계 때문에 어원이 두가지로 해석될 법한 말도 있다. ‘원껏’과 ‘원 없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없으나,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는 전자가, 우리말샘에는 둘 다 표제어로 나온다. ‘원껏’은 ‘바랄 願’을 써서 ‘원하는 만큼, 바라는 데까지’로 풀이한다. ‘실컷’은 어원만 따지면 ‘원껏’과 반대말이지만, 이렇듯 둘은 동의어다. ‘원 없이’는 우리말샘에서 ‘원망할 怨’으로 풀이한다. 바라는 데까지 이뤄진다는 것은 여한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는 바라는 바가 없다는 뜻도 된다. “어머니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정말 원이 없겠다” 같은 예문은 사전의 표제어 ‘원’(願)에 나온다.
일본어 嫌というほど[이야토이우호도]는 글자 그대로 ‘싫다고 할 만큼’인데, 실제 쓰임이 ‘실컷’과도 비슷하다. 다만 ‘실컷’과 달리 ‘싫다’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에, ‘실컷 먹다’와 ‘질리도록 먹다’가 다르듯 약간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거나 ‘심하게’처럼 쓰일 수도 있다. ‘통쾌’와 뿌리가 같은 중국어 痛快는 원뜻이 ‘통쾌/유쾌하다, 즐겁다, 흐뭇하다’인데 ‘마음껏, 실컷 즐기다’도 된다. 여기서 ‘痛’은 ‘아프다’보다는 ‘맵다’(사납고 독하다)의 파생어 ‘매우’, 또는 ‘되다’(벅차다, 모질다)의 파생어 ‘되게’처럼 강조의 구실이겠으나, 아프도록/아플 때까지 기쁜 것으로 본다면, 싫어질 때까지 흡족한 ‘실컷’과도 이어진다.
염세(厭世)나 염증(厭症: 싫증, 진저리)의 厭은 원래 ‘만족하다’였다가 이제는 ‘물리다, 질리다, 싫다’가 주된 뜻이다. 사자성어로는 무염지욕(無厭之慾: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에 남았고, 중국어는 貪得無厭[탄더우옌, 탐득무염: 욕심이 그지없다]에 주로 쓴다. 만족에서 싫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에 이런 의미 변천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슬프다’는 중세국어 ‘슳다’(슬퍼하다)에 ‘기쁘다, 아프다, 고프다’에 보이는 형용사 파생접사 ‘-브’가 결합한 것인데, ‘싫다’와 뿌리가 같거나 적어도 모종의 영향 관계는 있을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주로 알려졌는데, 원래 독일어 명사 Leiden[라이덴]은 ‘고뇌’(동사 leiden: 견디다, 고생하다)에 가깝고 ‘슬픔, 불행’(형용사 leid: 싫다, 미안하다)에 더 가까운 건 명사 Leid[라이트]다. 어원이 다르더라도 명사로서는 둘의 말뜻이 묘하게 겹치는 것이다.
‘만족하다, 물리다, 싫다, 슬프다’의 관계는 고대영어 sæd(배부르다, 물리다, 지겹다)가 현대영어 sad(슬프다)로 뜻이 바뀐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부정적인 뜻도 있었으나 ‘슬프다’는 나중에 생겼다. 영어 sad와 어원이 같은 말을 공유하는 딴 유럽 언어들은 영어만큼 원뜻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독일어 satt(배부르다, 물리다), 라틴어 satis(넉넉하다, 만족하다), 이탈리아어 sazio(만족하다, 배부르다, 물리다) 등은 영어 sad만큼 급격한 변화는 아니다. 라틴어 satis의 파생어는 영어에 satiety(포만감), satisfaction(만족) 따위를 남겼는데 딴 유럽 언어 동족어들의 뜻과 대동소이하다.
‘슬프다/술 푸다’나 ‘슬퍼/술 퍼’는 비슷한 발음 덕에 말장난으로 왕왕 쓰인다. 슬프면 한잔하기도 좋지만 너무 술 퍼서 찌뿌둥해지면 슬플 수도 있으니 ‘슬프다’와 ‘술 푸다’는 쌍방향으로 오간다. 독일어 satt와 네덜란드어 zat도 모두 원뜻이 ‘배부르다, 물리다’인데 입말에서는 ‘술에 취하다’의 뜻으로도 많이 쓴다. 라틴어 satur(배부르다)는 이탈리아어 satollo에서는 뜻이 달라지지 않은 반면 프랑스어 soûl에서는 ‘취하다’의 뜻이 됐다. 이 프랑스어 형용사는 글말에서 ‘물리다, 싫증 나다’도 뜻했으나 이제 거의 ‘취하다’로만 쓴다. 발음은 남성형 soûl[수], 여성형 soûle[술]이라서 후자는 한국어 ‘술’과 비슷하다. 즉 같은 인도유럽어 어원으로서 딴 서유럽 언어들과 달리 원뜻 ‘배부르다’가 사라진 게 유라시아 서쪽 끝자락의 영어 sad와 프랑스어 soûle인데, 동쪽 끝자락 한국어에서 ‘슬프다’와 ‘술 푸다’로 한데 모인다.
프랑스어는 특이하게 manger à sa faim(직역: 배고픈 만큼 먹다) 및 manger à satiété(배부르도록 먹다)라는, 서로 얼개가 매우 유사한 문구에 각각 허기와 포만이라는 반대말을 써서 ‘실컷/배불리 먹다’를 나타내기도 한다. 허기를 달래려고 허겁지겁 먹다 보면 잘못하다 배탈이 난다. ‘좋을 만큼’까지 가되 ‘싫도록/질리도록’을 넘지 않아야 딱 적당한 ‘실컷’인데, 때로 그 경계가 어딘지 알기 어렵다는 게 인간의 슬픔일지도 모르겠다.
신견식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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