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남 근대교육의 발상지 창평면 창흥학교 (하-1) [문화발원지 남도 학교기행]

#창흥의숙은 실재했던 것일까
창흥의숙(昌興義塾)이라는 학교는 없었다. 이런 도발적이고 단정적인 주장을 하면 의아하다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창평초등학교의 근원을 창흥의숙이라고 하거나, 그런 주장을 인용하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1908년 창평의 근대학교 개설 상황을 근접 보도하고 있는 기사, 직접적인 문헌자료를 검토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창평초등학교의 전신으로 알려진 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창흥학교(昌興學校)였다. 황성신문(이하 기사는 황성신문)에는 창흥학교 설립 관련 기사를 수차례 실었다. 첫 기사는 1908년 4월 8일이다. "융희 2년(1908년) 3월 26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당일 내빈은 경내 신사 30여 명과 본도 관찰사 김규창 씨가 참회"하였다는 것이다.
창흥학교 기사는 이후로도 몇 번 더 등장하지만 일관되게 '창흥학교'로 표기하고 있다.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개교식'이라는 표현이다. 처음 학교를 열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창흥학교 이전, 가령 1907년 무렵 창흥의숙이 운영되었더라면, 그래서 창흥의숙이 창흥학교로 전환된 것이라면 그와 관련된 보충 기사가 없을 리 없다.
1906년 상월정에서 운영되었던 영학숙은 고정주 개인의 재원에서 비롯된 사숙(私塾)이었다. 반면 창흥학교는 의숙(義塾) 형태였다. 의숙이란 발기인을 비롯한 설립 참여자들이 출연한 의연금이나 기부금을 재원으로 하여 공적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학교법인 형태라고 할 것이다.
비교 대상이 되는 근대학교 중 교명이 '의숙'인 학교가 없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던 일본의 게이오의숙이 그렇고 국내에서는 엄주익이 창설한 양정의숙(養正義塾, 1905)이나 민영휘가 설립한 휘문의숙(徽文義塾, 1906)이 같은 사례이다.

#담양의 근대교육과 창흥학교 설립
상월정의 영학숙 시대는 1906년 겨울을 계기로 마감된다. 이후 1년 동안 고정주는 호남 출신 인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호남의 신교육 진흥과 인재 양성을 위해 호남학회 설립에 몰두하게 된다. 활동 지역은 주로 경성, 즉 서울이었다. 첫 발기인은 고정주를 비롯하여 강엽, 백인기, 이항, 박영철 그리고 최우락 등 7인이었다.
1907년 7월 6일 오후 2시 대동문우회관에서 112명의 발기인이 모여 창립식을 열었다. 이어 7월 13일 두 번째 모임에서 고정주가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그의 사돈 김경중(김성수의 부친)이 평의원이 되었다. 3회 모임은 서울의 고정주 자택에서 개최되었는데, 주로 회비와 회관 건립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창립 10개월이 지난 후 고정주가 맡고 있었던 회장 역할은 이재호가 대신하였다. 1908년 3월을 전후하여 고정주는 주로 창평에 머물면서 창흥학교 설립과 운영에 매진하고 있었기에 호남학회를 겸업하기에는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남학회 회장으로서 활동과 인맥은 이후 창흥학교 운영과 학생 모집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08년 5월 8일 기사에 의하면 처음 입학 학생의 수는 30여 명이었다고 한다. 홍긍현(洪肯鉉)이라는 사람이 교사로 참여하였다. 개교 초기에는 고정주의 거취가 확정되지 않아 약 3개월 동안은 창평군수였던 황익연(黃翼淵)이 교장을 맡았던 모양이다.
월말고사를 치른 결과 성적이 좋은 갑급 우등생에 문용준, 박이규, ○근규가 선정되었고, 을급 우등생에는 문병주, 임복동, 박귀효가 선정되어 다양한 상품을 시상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창흥학교 설립을 위한 기부금 현황(1908년 4월 8일 3면)도 보이는데, 도지사 김창규 30원, 창평군수 황익연 40원, 기타 지역의 유력자 중 고액 기부자들이 30~50원 수준이었다.
특별히 고정주는 70원이라는 최고액을 기부하였다. 그만큼 신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을 뿐아니라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듬해 1909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가인 김병로(金炳魯, 1887~1964)가 입학했을 때의 교명도 창흥학교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교장은 고정주, 교감은 호남학회에 참여했던 이병성었으며, 일본인 교사가 1명 근무했다고 한다. 학생 수는 늘어서 50명 남짓이었으며 모두 단발을 한 학생으로 나이는 13세에서 23세가량이었다.
초등과는 3년 과정, 고등과는 6개월 속성 과정으로 복수 교육과정이 운영되었다. 교과는 역사, 지리, 영어, 산술, 한문 등 대체로 신학문이었다. 개교 후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는 모자를 착용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김병로는 고등과정을 수학한 후 그 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창평 출신이지만 곡성 지역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신태윤(申泰允)도 1909년 창흥학교에 입학하여 김병로와 함께 수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이보다 먼저 오늘날 담양읍에 '담양군 공립소학교'가 운영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도 현재의 담양 동초등학교라고 여겨진다. 내용은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담양군수 김덕수(金德洙)가 담양 사림의 공의(公議)를 따라 소학교를 창설하고 유생의 추천으로 조병권(趙炳權)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운영비는 본 군수 및 유생들이 출연하여 학생 50여 명을 교수하니 공립학교로 인허하라고 학부에 요청하였다.(1901년 4월 16일) 이후 조병권은 부교원으로 임용되었는데(1901년 4월 26일), 무슨 일인지 1년 뒤에 해임되고 조황흘(趙晃屹)이 임용되었다(1902년 8월 7일). 더 연구하고 확인이 필요한 사안이다.
#창흥학교의 발전
사숙에서 의숙으로 전환함으로써 비로소 학교 운영과 재정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립 초기에는 군수 황익연이 교장을 맡았지만 몇 개월 후 고정주는 45세의 적지 않은 나이, 그것도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직각 출신임에도 자신이 직접 학교 운영에 참여하여 교장을 맡았다. 영학숙 경험을 토대로 창흥학교를 의숙 형태로 전환하여 마침내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창흥학교는 개교식은 창평군 객사였던 용주관(龍洲館)을 수리하여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용주관은 현재 창평초등학교 교문 인근에 있던 건물이었다. 개교 이후 학교 운영비와 식비 등은 대체로 고정주가 충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 소유의 임야와 전답을 내어 학교 운영에 전념하였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파악한 호남지역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고정주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다. 창평 고정주 849정, 영암 현준호 713정, 담양 대전면 출신으로 광주에서 활동하였으며 병천사 설립과 호남은행 설립에 참여한 지응현 485정, 광주 최선진 470정 등이다. 1정을 3천 평으로 환산하자면 고정주 소유의 농지는 무려 2백55만 평이 된다. 재력이 충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교 개설 초기에는 학생 수가 학년별 10명 미만으로 소규모였다. 용주관을 개축하였다고는 하나 공간이 좁았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더불어 단발 규정과 같은 교칙은 거부감을 갖기에 충분했다. 아직 인근 지역에서 서당이나 서원교육 즉 전통적 사숙교육을 행하던 유생 혹은 사대부층 자제들은 이런 근대학교를 교육적 이단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창평지역의 대표 가문(장흥 고씨를 비롯 전주 이씨, 함양 박씨, 김해 김씨 등 5개 가문)의 인맥을 중심으로 가문별 또는 마을별 추천제 입학을 적용하였다. 그러므로 초창기 창흥교육은 보통교육이라기보다는 소수 영재교육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수적 유림이나 성리학적 지식교육을 하던 서원 중심의 사대부층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신교육이라는 이름의 근대교육을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교육의 흐름은 이미 대세가 되었다. 일제의 식민 정책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1910년 공식적인 창흥사립보통학교에 이어 1911년 6월에는 창흥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1919년부터는 여학생도 3명이 입학하였다. 1923년에는 6년제로 교육과정이 연장되었다. 1938년에는 창흥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4월에는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취지로 창평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가 해방 후 1996년에 마침내 오늘날 창평초등학교에 이른 것이다.
창평을 넘어 호남 근대교육의 발원지로서 창흥학교가 여러 차례 변모하는 과정에서 고정주의 역할이 어떠하였는지는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고정주는 1933년 생애를 마감하는데, 그의 비문에도 창흥교육 관련 사실이 드러나 있지 않다. 아직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친필 일기와 『춘강유고집』이 존재한다는데,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그의 고손인 고영진 교수(전 광주대 사학과)가 2024년 지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근대화의 두 길, 유천마을과 삼천마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1533~1592)은 현 광주시 남구 압촌마을 제봉산 자락에서 나고 자랐다. 금산전투에서 40일간의 혈전 끝에 둘째 아들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와 순국하자, 자손들이 고경명의 부인인 정경부인 울산 김씨 슬하에 의지하다가 고인후의 처가가 있는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 옮겨 살았다. 창평은 원래 언양 김씨와 함평 이씨가 터를 잡고 살았지만 고인후의 후손들이 창평에 정착한 이후에는 고씨 가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오늘날 창평면 삼천마을과 유천마을은 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두 마을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삼천마을은 월봉산으로 향하는 길목 왼편에 있고, 유천마을은 오른편의 월봉산 자락 아래에 있다. 처음 유천에 모여 살던 고씨들이 고인후의 증손 대에 일부가 삼천으로 분가하며 두 지역 모두가 생활 터전이 되었다.
같은 고씨 집안이지만 유천마을과 삼천마을이 배출한 인재들의 성향은 퍽 다르다. 유천마을은 임진왜란 이후 구한말까지 호남 지역 의병 운동의 중심지라면, 삼천마을은 근대 신교육 운동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다. 전통과 충절을 앞세운 의로움을 상징하는 마을이 유천이라면, 삼천마을은 개화와 신교육으로 대표되는 문풍(文風)이 넘치는 곳이다.
의병장의 종손답게 유천마을 출신으로 고인후의 11세 종손인 녹천 고광순(鹿川 高光洵, 1848~1907)은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의병에 나섰다. 이어 1905년 을사의병을 거쳐 1907년 10월 구례 피아골 연곡사를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를 치루다가 6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연곡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의병장 고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졌다.
그런가 하면 삼천마을에서 신교육 운동을 주도한 이는 춘강 고정주이다. 학봉 고인후의 10세손으로서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구한말 규장각 직각 벼슬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기점으로 낙향하여 고향에 근대학교인 영학숙과 창흥학교를 세우고 신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동아일보를 창업한 인촌 김성수의 장인이자, 동아일보 회장을 역임한 고재욱의 조부이기도 하다. 또 춘강의 후손인 고일석은 무등양말의 창업자인데 1980년 창평고등학교 설립하며 인재 양성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항렬로는 고정주가 높은 숙질간이며, 나이로는 고광순이 15세 연상이다. 고광순의 의병 활동이 성공한 것은 고정주를 비롯한 창평지역 고씨들의 경제적 지원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관련된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지고 있지만 이곳에서 다하지 못한다.
위정척사에 입각하여 고광순은 무장 의병을 일으켰고, 개화와 신교육에 앞장섰던 고정주는 사재를 출연하여 근대학교를 세웠다. 그러면서도 커다란 반목 없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동학과 일제 강점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념 갈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도 동족 간 인명 피해가 없었던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다만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의 두 갈래인 무장투쟁과 애국계몽운동과는 구별하여 접근하여야 하리라 본다. (하-2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