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GO! 사표 쓰고 미국 종단] ⑶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신시내 기자 2025. 6. 2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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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Pacific Crest Trail·미국 서부 종단 트레킹). 태평양 연안을 따라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무려 4300㎞나 이어진 장대한 길이다. 1년에 8000명 정도가 도전하지만 약 20%만이 성공하고, 일부 도전자는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완보의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이 고행의 길을 <농민신문> 자매지 월간 <전원생활>에 몸담았던 신시내 기자가 도전에 나섰다. 신기자의 PCT 무사 완보를 응원하며, <농민신문>이 그의 종단기를 독점 연재한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쉬는 단순한 여행인데도 컨디션은 매일 아침 달라진다. 출발점에서 480㎞ 지점, 남부 캘리포니아를 지나던 그날도 그랬다. 여행 27일차에 들어서면서 이제 하루 25㎞는 물론이요, 30㎞도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날은 유난히 속도가 안 났다. 웅장한 풍경이나 신기한 생물도 제쳐두고 오직 ‘그동안 아껴둔 매운 볶음라면을 저녁에 먹겠다’는 생각만이 나를 걷게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하이커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기꺼이 번거롭거나 긴 거리 걷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평소 식사를 생각하면 이런 선택이 이해가 간다.  
라면은 끓이지 않고 봉투에 넣은 채로 뜨거운 물을 부어 익혀 먹는 소위 ‘뽀글이’ 방식으로 조리해 가스도 아끼고 설거지 거리도 줄인다.

장거리 하이킹을 할 때 먹는 식사 메뉴는 종류는 다양하지만 조리법이 무척 단순하다. 우리는 주로 뜨거운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동결건조식품, 인스턴트 파스타, 한국 라면, 잼과 빵, 단백질 바 등을 먹는다. 서양인들에게는 불린 오트밀이나 토르티야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 메뉴도 인기가 많다. 우리는 도저히 취향에 맞지 않아 사본 적은 없다. 어떤 맛보다는 무게와 신체 에너지 효율을 위한 선택이 중심이 된다.  

2명이 5일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 미국답게 간편식이 발달해 선택지가 다양한 편이라 취향에 맞게 식단을 짤 수 있다.

그러던 중 지난번 재 보급지 마트에서 한국의 매운 볶음라면을 발견했다. 전 세계에서 유행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규모가 있는 곳에서는 그 매운 볶음라면을 2종류 이상 판매하고 있었고, 운 좋게 챙겨오게 됐다. 동시에 오늘의 야영지를 찾던 남편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여기서 10㎞ 더 가면 자연 온천이 있대! 오늘은 여기서 자자!”

자연 온천?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든 산속에 온천이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은 잔칫날이 될 것이다. 24㎞에 달하는 하이킹 일과를 마치고 온천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식사 준비에 나선다. 하루 종일 고대하던 시간이다. 볶음면이지만 면 삶은 물을 버릴 수 없으니 국물을 자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모자란 단백질을 추가하고자 참치도 한 팩 털어 넣어준다. 이곳 식사는 탄수화물 위주라 영양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되도록 팩에 담아 판매하는 참치나 스팸, 닭고기 등도 함께 챙기고 있다. 건강해야 종주도 무사히 완성할 수 있어서다. 

완성된 라면을 한 입 먹자마자 강한 매운맛에 정수리까지 짜릿해지며 모든 스트레스가 땀과 함께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라면을 끓이는 시간보다 먹는 시간이 짧았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면발이 입으로 들어갔다. ‘이 맛에 고생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늘의 고생은 이 라면 한 그릇으로 모두 보상받았다. 

남는 매운 볶음 라면 소스는 따로 챙겨뒀다가 다른 요리에 넣어서 먹는다. 다른 하이커들은 이 소스를 병 채로 갖고 다닌다.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온천이다. 이곳의 명칭은 ‘딥 크릭 핫 스프링(Deep Creek Hot Spring)’. 이 온천은 너무나 아늑하고 신기했다. 시원한 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 한구석에서 따뜻한 온천수가 새어 나오는데 이 주변에 돌담을 쌓아 물을 가두고 몸을 담글 수 있게 탕을 만든 형태였다. 그런데, 온천 속 사람들 대부분이 나체 차림이었다. 나도 그래야 하나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어 옷을 다 챙겨 입고 수줍게 들어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이 미국식 문화라고. 온천수는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딱 좋은 온도였다. 온수 목욕은 그동안 호텔에 묵거나 캠핑장에 돈을 내야만 할 수 있었는데, 공짜라고 생각하니 더욱 만족스러웠다. 

딥 크릭 핫 스프링 전경. 사진 가운데 남성이 앉아 있는 곳이 온천. 하이커가 아닌 일반 관광객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맛있는 식사와 개운한 온천욕을 마치고 나니 다음날 있을 40㎞ 하이킹 일정을 향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이틀 뒤 카종 패스(Cajon Pass)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서 꼭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카종 패스에는 맥도날드가 있어 모두가 통과의례처럼 이곳에서 식사를 즐긴다. 과연 나는 원하던 생선가스 버거를 먹을 수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자리에 든다. 

카종패스 표지판. 트레일의 명물인 만큼 표지판에도 맥도날드의 상호가 기재되어 있다. 이곳에 계획대로 도착한 우리는 점심으로 햄버거를 다섯 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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