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소파, 거대 정원도 뚝딱…무궁무진 한지 마술

서정민 2025. 6. 21.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지에 매료된 젊은 공예가들
전주·문경·임실 등 전국에 18개 전통한지 공방이 있지만 그중 10곳만 새로 한지를 만들고, 8곳에선 재고 판매만 한다. 수작업으로 전통한지를 만드는 과정이 힘들어 전수자는 줄고, 기술을 보유한 장인은 나이 들어가는 상황이다. 아직도 대량 주문은 꿈 같은 일이지만, 최근 들어 젊은 작가들이 새로운 소재로 한지를 찾으면서 한지의 가치와 매력에 주목하는 눈길이 늘었다. 한지의 어떤 매력이 젊은 작가들을 반하게 했을까. 최근 국내외에서 한지를 소재로 활발히 작품 활동 중인 작가 네 명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이정인 작가
‘2025 로에베재단 크래프트 프라이즈’ 파이널 30인에 선정된 이정인 작가의 한지로 만든 소파. [사진 로에베]
지난 5월 30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박물관에서 ‘2025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후보에 오른 30인의 작품 전시가 시작됐다. 올해 공예상은 133개 국가 및 지역에서 접수된 4600여 건의 작품 중에서 선정됐다.

그중 이정인(40) 작가의 한지 소파 ‘소프트 랜드스케이프(A Soft Landscape)’는 나무나 금속 등 지지 구조가 보이지 않아 구름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인다. 과연 앉을 수 있을까? “성인 남자 한 명이 앉고, 양쪽 팔걸이 부분에 두 명의 성인 남자가 동시에 걸터앉아도 문제없었어요. 한지는 물에는 취약하지만 여러 겹을 겹쳐서 말리면 놀라울 정도로 단단해지거든요.” 이 한지 소파는 작게 찢은 한지 조각 300장을 밀가루 풀로만 겹쳐 붙여 한 장의 커다란 레이어를 만들고, 이렇게 만든 레이어 130여 장을 또 겹쳐서 완성했다. 레이어 한 장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4~5시간.

이정인 작가
영국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나무로 가구를 만들던 이 작가는 2015년 아이를 낳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육아와 작품 작업을 동시에 하려니까 무거운 것도, 도구가 많이 필요한 것도 싫더라고요. 무엇보다 아이 때문에 재료의 친환경성, 지속가능성이 궁금해졌어요. 3년 전 우연히 알게 된 한지가 이 모든 것에 답을 줬고, 이후부터 한지를 10장씩 늘려 겹치면서 가구에 어울리는 강도를 실험 중이에요.”

‘지금은 가구를 만들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작가는 현재 한지로 만들 수 있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 중이다.

“한지에 밀가루풀을 바르면 굉장히 부드러워져서 어떤 표면, 어떤 형태에도 유연하게 붙죠. 그런데 마르면 엄청나게 견고해지죠. 무엇보다 어떤 쓰레기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 좋아요. 플라스틱처럼 언제 그 가치가 바뀔지 모르고, 아예 만들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인공재료와 달리 한지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이고 1000년 동안 변하지 않은 가치를 지녔다는 점도 매력이죠.”

●김현주 작가
디올의 아카이빙 전시 ‘디자이너 오브 드림’ 공간 중 김현주 작가가 한지로 꾸민 ‘에테르의 정원’. 수백 송이의 꽃, 20만여 개의 잎사귀로 가득하다. [사진 ⓒKYUNGSUB SHIN]
오는 7월 13일까지 서울 DDP에서 진행 중인 ‘크리스챤 디올: 디자이너 오브 드림스’ 전시에는 ‘에테르의 정원’이라는 공간이 있다. 건축가 쇼헤이 시게마츠가 한옥의 중정과 달항아리를 재해석한 공간인데, 이 둥글고 넓은 정원에는 지금 한지로 재현한 식물들로 가득하다. 수백 송이의 꽃, 20만여 개의 잎사귀, 20여 마리의 나비, 9그루의 나무. 모두 김현주(44) 작가가 한지로 만든 작품이다.

“크리스챤 디올의 프랑스 정원에 있는 장미·은망울꽃·등(나무)꽃, 한국의 달항아리에 주로 그려진 매화·소나무, 그리고 동서양에서 모두 사랑 받는 모란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식물이 공존하는 상상의 정원을 구성했죠.”

김현주 작가
바닥과 벽을 장식하는 20여만 개의 한지 잎사귀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모내기를 하듯, 5㎝ 길이 구멍에 하나하나 손으로 꽂았다. “자연 그대로의 힐링 되는 정원이길 바랬고, 접착제를 사용하면 나쁜 냄새가 날 수 있으니까 아예 그 요소를 뺀 거죠.”

가공되지 않은 천연 소재로 여러 작업을 해온 김 작가는 한지에 대해 “전통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실험이 가능한 소재라 매력적”이라며 “작은 틀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한지를 직접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이번 정원의 꽃과 잎사귀 중 독특하고 두꺼운 질감의 한지는 김 작가가 직접 만든 것이다. “크리스챤 디올이 ‘꽃을 닮은 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섬세함과 강인함을 옷에 동시에 표현한 것처럼, 저도 한지라는 매체를 통해 대비와 조화를 자유롭게 표현해보려고 해요.”

● 고소미 작가
고소미 작가가 한지를 꼬아 직접 만든 실 ‘소미사’와 철사로 만든 조명 작품. [사진 고소미]
“한지로 만든 조형물에 전구를 넣으면 조명이 되고요, 평면 한지를 여러 개 연결하면 커튼이 되죠. 한지는 정말 유연한 소재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요.”

조병수 건축가를 비롯해 지랩, 포머티브 등의 건축 스튜디오와 함께 협업하며 독특한 힐링 인테리어 소품을 디자인하고 있는 고소미(47) 작가의 말이다.

고 작가의 대학 전공은 한국화다. 한지에 그림을 그리다 어느 날 ‘이 그림이 바람처럼 하늘에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람처럼 날릴 수 있는 한지의 물성 연구를 시작했고, 한지와 일본 화지를 비교하고 싶어 일본 타마미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전 세계 섬유미술계 3대 선두주자 중 한 명인 다나카 히데오 교수를 사사하면서 한지와 함께 식물성 섬유를 함께 연구했다. 그 결과, 고 작가는 한지로 자기만의 독특한 실을 만든다. “양모 털로 실을 만드는 울 펠트 수업을 듣다가 물레에 종이를 넣고 돌리면 종이가 꼬이면서 실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명 ‘소미사’의 탄생이다.

고소미 작가
고 작가는 종이 실이 좀 더 단단하길 원하면 모시 실 또는 삼베 실을 같이 엮어서 합사를 만든다. “결국 종이가 주 소재지만 세탁도 가능해져요.”

고 작가는 한지의 매력이 자연스러움이라고 했다. “한지 끝은 매끈하게 잘려있지 않아요. 금방이라도 한올 한올 풀려서 날아갈 듯 포슬거리죠. 그 완벽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여기와 저기를 언제라도 이을 수 있을 것 같아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하죠.”

고 작가는 조명 덮개를 만들 때도 100% 한지로만 만든 소미사와 철사로 형태를 만들고, 닥나무를 삶아 이긴 죽에 빠뜨렸다가 꺼낸다. 그러면 접착제 없이 작품 표면에 한지 섬유가 붙고, 천천히 마르면서 자연스러운 면과 틈이 만들어진다. 빛은 그 사이로 자연스레 오간다.

● 권중모 작가
권중모 작가가 만든 한지 조명. 일정한 간격으로 접어 빛의 음과 영을 살렸다. [사진 권중모]
권중모(44) 작가가 디자인하는 한지 조명의 특징은 ‘접힘과 겹침의 미학’이다. 한지를 어느 정도, 어느 모양으로 겹치는가에 따라 빛의 투과성과 빛이 만드는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다. 2017년 처음 선보인 조명 ‘레이어스 펜던트’는 한지의 고유함을 살려서 원으로 잘라 반으로 접고 겹치기만 했다. 곤룡포가 횟대에 걸려 있는 사극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으로, 빛깔 고운 모시 한복 저고리가 떠오른다.
권중모 작가
한지를 너비가 다르게 ‘주름’ 잡는 일도 권 작가의 ‘겹’의 해석 중 하나다. 한지를 접으면 접힌 부분은 빛의 투과가 덜 된다.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보고. 접는 면을 넓게도, 좁게도. 주름 방향을 가로, 세로, 사선으로 바꾸기도 한다. 조명에 사용되는 한지의 주름은 권 작가가 직접 접는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소량 생산인 데다, 원하는 두께·너비·방향으로 주름 잡기에 손만큼 완벽한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권 작가는 한지 조명에 ‘나만의 색’을 입히는 작업을 실험 중이다. “옻칠로 채색을 하는 방법이에요. 가장 하고 싶은 건 검정색을 완성하는 거죠. 검정 염료로 물들인 한지는 빛을 투과하지 않지만, 검정 옻칠을 얇게 한 한지는 아주 옅게 빛을 통과시키거든요. 옻칠의 두께에 따라 드라마틱하면서도 우아한 빛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대가 커요.”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