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이야기- 진주 대동공업] 6부 김삼만과 기공일생(機工一生) ⑮ 임자, 나 박정희요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 방문해 격려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로 생산 성공
정부, 농로 정비·부속품 원가 절감 노력
농민 부담 줄여 ‘농촌 기계화 꿈’ 현실로
1962년 10월 김삼만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진주 대동공업사를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에도 농기계 생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64년 대동공업사 경운기 생산 현장을 둘러 보는 모습./대동50년사/

대동공업사가 농기계 관련 기계를 생산하는 회사로 알려지자 1960년 10월 윤보선 대통령이 공장을 방문해 격려했다. 사진 중앙 작업복 차림으로 안내하는 분이 김삼만 사장이다./대동50년사/
◇박정희 의장의 대동공업사 방문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1963년 12월, 5대 대통령에 정식 취임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신분으로 방문할 당시 대동공업사의 주요 생산품은 자체 기술로 만든 가마니 짜는 기계, 사료 분쇄기, 원동기 등 기초적인 농기구 정도였지만 경운기 생산 준비를 하는 등 농기계 제작 전문기업으로 한발 한발 변화와 성장을 하고 있는 단계였다.
박정희 의장이 대동공업사 공장 현장에 들어서자 김삼만은 “각하, 앞으로 한국 농촌에는 반드시 경운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경운기 제작과 관련된 계획을 보고하고 공장 시설을 안내했다.
한국 농촌 변화와 농기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의장은 김삼만에게 “임자, 이런 기계들의 제품이 모두 국산화가 가능합니까?”
“네. 100% 국산화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기름기가 배어 있는 김삼만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대동공업사 방문 모습./대동50년사/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은 한국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재임 중 두 번이나 대동공업사를 방문했다. 사진은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대동공업사 방문 모습./대동50년사/
◇1963년, 한국 최초 경운기가 생산되다
박정희 의장의 대동공업사 방문 후 자신감을 가진 김삼만은 1962년 11월 로열티 문제로 중단된 미쓰비시와 기술제휴 체결을 위해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기술 문제, 로열티 문제 등의 상호조건을 조정해 마침내 1962년 12월 10일 대동공업사와 미쓰비시 중공업이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대동공업사에서 생산하는 경운기는 ‘미쓰비시 제품 부속 사용 70%, 국산화 제품 부속 사용 30% 비율로 완성한다. 매년 10%씩 국산화 비율을 높인다. 생산 수량은 연간 300대로 한다’였다.
계약조건에 따라 기술제휴 1년 차까지는 엔진을 비롯한 중요 부속품은 일본에서 가져왔다. 부속품 중 일부분은 대동에서 제작해 조립 완성품을 만들어 나갔다.
김삼만은 “오늘 배운 작은 기술, 내일 배울 작은 기술이 모이면 언젠가 완성 기술이 되니 쉬지 말고 노력하자”고 직원들을 격려하면서 ‘중단 없는 전진’을 했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대동공업사 방문 모습./대동50년사/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농촌의 변화와 현대화를 위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대동공업사를 방문하여 농기계 제작, 생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은 1964년 대동공업사 경운기 생산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대동50년사/
◇경운기 보급의 어려움
경운기는 농촌에 필수적인 농업 기구이지만 가격이 아주 고가였다. 일반 농민이 쉽게 구매할 수 없어 수요가 쉽지 않았다. 농민에게 많이 보급되기 위해서는 경운기 가격을 낮추어 생산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당시 한국의 독자적인 기술로는 경운기 제작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대동공업사 생산 경운기도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로 만들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하고 경운기의 국산화 생산이 또 하나의 과제였다.
농업의 기계화가 우리나라 농촌의 시급한 과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는 ‘농공병진과 농촌근대화 정책 추진’에 국산 경운기 생산과 농촌에 경운기가 공급되도록 대책을 수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한국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두 번이나 대동공업사를 찾았다. 사진은 1962년 방문 모습.
◇한국 농촌의 현실
우리나라의 농토는 경운기를 쓰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경지정리가 안 된 것도 문제였지만 경운기가 다닐 만한 농로도 없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운기는 농촌에 꼭 필요한 농업기계의 하나였다.
정부도 농로 정비 계획을 추진하고 농촌기계화를 위한 꾸준한 계몽을 해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동공업사의 경운기 생산을 보도한 1963년 3월 13일자 경남신문.
◇경운기 보급 정책
1963년 대동에서 처음 출시한 동력 경운기는 1대당 14만원으로 농민에게는 매우 값비싼 기계였다. 정부에서는 경운기 보급을 통한 농촌 발전, 농업의 기계화를 위한 정책 추진으로 정부에서는 50% 국고 보조금과 융자로, 농민들은 자기 부담 50%만 내고 농민들이 경운기 구입을 하도록 담대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도 한국의 많은 농민들이 경운기를 구입하기에는 그래도 비싼 금액이었다.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경운기 부속품을 들여와 농민의 가격 부담을 줄여주는 방식도 추진했다.
대동공업사도 생산원가를 절감하고 새로운 기술력을 도입해 가격 인하에 동참하는 등 농민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경운기 보급의 성공 요인
한국에서 경운기가 농촌지역에 빠르게 보급된 이유가 운반용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 통계도 있다. 경운기는 농촌에서는 만능기구로 다양하게 사용됐다. 그뿐만 아니라 경운기는 도시에도 좁은 골목길과 언덕길에 연탄과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으로 활용돼 사용의 범위가 확산됐다.
경운기가 도시에서 운반용으로 많이 사용되자 일반 차량의 운송 영업에 영향을 많이 준다는 민원이 제기되자 정부가 나서서 경운기의 용도를 규제하는 정책이 수립되기도 했다.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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