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사회 약자 위해 헌신한 청년운동가의 불꽃같은 삶




◇노동자 힘 모아 사회 역군으로
당시 평택의 사회운동 역시 방향전환 중에 있었던 것 같다. 3·1운동 이후 실력양성론에 입각해 조직됐던 청년단체들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방향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1927년 진위청년회가 혁신총회를 개최했으나 '혁신'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혁신총회 이후에도 여전히 '청년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상환은 1929년 12월 19일 서정리노동조합을 창립하고, 1930년 6월 1일 낙성한 오산사회단체연합회관 건립에도 관여했다. 서정리노동조합 창립의 배경에는 서정리에 자유노동자가 100여 명에 달했으나 그들을 지도할 기관이 없으며, 이들을 모아 사회역군을 양성하겠다는 남상환을 비롯한 주도자들의 의도가 있었다. 창립 대회 당일 남상환은 상무집행위원장에 선임됐다. 이후 강령이 불온하다며 일제 경찰당국이 해산 명령을 내리자 남상환 등 집행부는 장시간 토의한 결과 회의 명칭을 서정리노동청년회로 변경했다.
서정리노동청년회는 역전인부 노임 인상 등 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냈고, 1930년 2월 10일 서정리공립보통학교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남상환은 '조선의 병은 누가 고치나'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외에도 김인손, 홍학유, 이용근, 홍선유, 정태선 등도 강연했다. 그리고 일제의 경찰 문서에 따르면 그는 1930년 8월 이종림의 지도 하에 진위소년동맹과 진위청년동맹의 창립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이는 후술할 수진농민조합의 혁명적 전환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농민조합의 혁명적 전환 이끌어
진위소년동맹은 1931년 5월 3일 무산아동야학기관을 망라해 '무산소년데이'를 개최하고자 했으나 일제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모곡리, 두릉리, 장안리 등 각 야학의 아동 100여 명과 서정리 아동 100여 명 등 200여 명이 서정리 광장에 모여 남상환의 개회사로 기념식을 가졌다. 서정리 역전까지 2시간의 기행렬을 한 후 아동에게 조선개피떡을 나누어 주고 해산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참석한 아동의 50%가 서정리 출신이었다. 이는 남상환이 야학강습소, 진위소년동맹, 서정리노동청년회, 서정리노동조합 등 서정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대중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결과 평택지역에서는 1930년을 전후해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들이 속출했다.

◇일제의 조작 사건으로 투옥, 세상 떠나
혁명적 전환 이후 수진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초순 용소리의 토지관리인인 사카모토와 소작인 간의 소작계약을 문제 삼아 소작쟁의를 준비했다. 황구지리 천변에서 회의한 후 장주문과 이원섭을 소작쟁의의 책임자로 선정하고 홍건표와 이종국 등을 통해 황구지리 야학의 학부형회라 칭하고 소작인을 모아 소작인회를 개최해 소작쟁의를 선동했다. 이 소작쟁의를 황구지리 소작쟁의라고 한다.
이 소작쟁의에 연루됐던 박승극, 김영상, 장주문, 이원섭 등은 1933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됐다. 다만 재판 이전 보석으로 석방됐던 남상환은 출감 후 폐병과 위장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동지 600여 명이 남상환의 장례식에 대거 참여했다고 사진과 함께 보도한 바 있다. 이는 남상환이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졌는가를 보여주는지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황구지리 소작쟁의는 일제 경찰의 조작이었다는 것이 김시중의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김시중은 수진농민조합은 조합 이름을 걸고 힘들게 조직사업을 하고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조합의 내외적 위세가 없었다고 하면서 청년동맹원으로 농조일도 함께 봤던 이원섭이 일제의 경찰 끄나풀로서 양감면에 파견됐던 고등계 형사와 짜고 '농민조합의 전투적 투쟁계획서'라는 문서를 날조해 만든 사건이라고 증언했다. 이러한 김시중의 증언은 박승극의 소설 '항간사'의 김상원의 행적과 일치한다. '항간사'는 "김상원은 원래부터 야마시꾼(사기꾼)이었다"로 시작한다. 김상원은 "(사회운동 단체에서) 두 번째나 당한 제명 때문에 행세를 할 수 없던 터에"라고 해 김상원이 사회운동 단체에서 두 번이나 제명당한 적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춘식이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김상원, 즉 이원섭의 첩자 행위를 증언했다.
그리고 남상환(소설 속 최상천)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최동무가 죽고 말았다오. 최상천이 말여요."
옆에 있던 춘화가 성을 내는 것처럼 쏘아 붙였다.
"…… 으흐 …… 그가 죽다니? 그래 나와서 그렇게 곧 죽는단 말인가? 그것 참……."
홍서방은 깜짝 놀라기를 마지아니했다.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침통한 빛만이 똑같이 흐르고 있었다.
봄을 영원히 등진 최상천의 죽음은 봄과 등지고 사는 이 사람들의 살과 뼈와 그리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야 만 것이다.
그는 지난번 공판 때에 병이 더 심해져서 그제야 보석이 허가되어 집에 나왔던 것이나 나온지 일주일도 되지 못하여 죽어버렸다. 죽음 앞에는 누구라도 장담을 할 수 없는 일이다.
뼈만 앙상하게 남고 이제는 피도 다했는지 그렇게 쏟던 피까지 막혀버린 그일망정 "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죽지 않어."
"아- 기막힌다"고 외치던 사람이 죽을 때엔 말 한마디 못하고 자는 듯이 눈감아 버린 것이다. 그는 한 많은 짧은 생애를 이렇게 마쳐버렸다.
조성운 역사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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