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살아도 돼’…호주 섬에서 만난 알파카와 숲과 바람의 처방전

박미향 기자 2025. 6. 2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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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 여행 ②
‘레이먼드 아일랜드’에서 만난 야생 코알라. 최근 20년간 개체 수가 급감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이다. 박미향 기자

그놈은 갇혀 있지 않았다. 성인 키의 얼추 5~6배 되어 보이는 나무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놈을 관찰하는 일은 경이로운 경험이다. 코알라가 아니라 자유를 쟁취한 특별한 개체처럼 보였다. 지난 4월29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 남동쪽에 위치한 깁슬랜드 페인스빌에서 ‘레이먼드 아일랜드’로 향하는 페리(연락선)에 올랐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한 풍경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상징하는 코알라. 잘 정비된 국립공원이나 보존 시설에서나 볼 법한 ‘구경거리’로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코알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동부나 남동부 해안 지역 유칼립투스 숲이 우거진 데 서식한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야생 코알라를 목도하는 일은 특별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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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1년간 오스트레일리아를 찾은 나라별 순위 8위에 올랐다. 필리파 해리슨 오스트레일리아관광청장은 “매년 한국인 관광객 수가 급상승하고 있다”고 지난 4월28일께 브리즈번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 관광 교역전 2025’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재방문하는 한국인 수도 늘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여행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시드니, 멜버른 등 세련된 도시 여행보다 울창한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이 나라의 속살을 제대로 ‘발견’하려는 식으로 말이다. 레이먼드 아일랜드가 대표적인 여행지다. 손에 꼽히는 야생 코알라 서식지다. 4월29일부터 나흘간 한 깁슬랜드 여행에서 야생과 거대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목도했다. 그 안에서 작물을 키우며 애그리투어리즘(농업+관광) 생태계를 구축한 농부들도 만났다.

깁슬랜드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곳이다. 원시 자연을 목도한 듯한 기분이 든다. 거대한 자연을 탐험하게 하는 독특한 여행지다. 박미향 기자

‘멸종 위기’ 코알라의 섬

레이먼드 아일랜드 선착장에 발을 내딛자 짙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회색빛 솜뭉치 구름이 몰려왔다. 3~5분 간격으로 200m 거리를 오가는 페리만이 유일한 입도 수단이다. 이날 섬을 둘러싼 색은 잿빛이었지만 바람만은 청명한 날과 다를 바 없었다. 자연의 충만한 맛이 폐 속까지 스며들었다.

이 섬이 속한 깁슬랜드는 멜버른 동쪽에서 뉴사우스웨일스주 경계까지 약 542㎞ 뻗어 있는 지역이다. 빅토리아주 전체 면적의 20%나 차지하는 광활한 대자연의 보고다. 시드니 다음으로 큰 도시인 멜버른에서 차로 2~4시간 거리에 있다. 멜버른을 여행 거점으로 삼은 이들은 하루 정도 깁슬랜드 대자연 투어에 나선다.

레이먼드 아일랜드는 작은 섬이다. 길이와 폭이 각각 6㎞와 2㎞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거주민도 500명 정도. 어쩌면 코알라가 더 많이 사는 섬일지 모른다. 1950년대 초 정부가 이주시킨 야생 코알라가 번성해 지금은 ‘코알라 섬’이라고 불린다. 마을 도로 곳곳에 ‘야생 코알라 관찰지’임을 표시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윽고 도착한 숲.

야생 코알라 서식지인 ‘레이먼드 아일랜드’의 숲에서 코알라를 찾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박미향 기자
야생 코알라 서식지인 ‘레이먼드 아일랜드’의 숲에서 쌍안경으로 코알라를 찾고 있는 관광객들. 박미향 기자

“저기! 저기요!” “움직여요! 저 나무로 건너가는데요!” 코알라의 먹이 유칼립투스 잎이 무성한 나무를 올려다보던 여행객들이 외쳤다. 쌍안경을 든 이들도 있었다. 굵은 나뭇가지에 딱 붙은 코알라는 나뭇가지와 털색이 비슷해 숨은 그림 찾듯 집중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다. “너무 귀여워요!” 감탄사를 연발하는 ‘인간들’을 향해 코알라는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인간이 ‘구경거리’다. 시설에서 집중 관리되는 코알라와는 사뭇 움직임이 달랐다. 민첩했다. 털마다 생기가 돌았다. 눈동자는 초롱초롱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코알라는 최근 20년간 개체 수가 급격하게 감소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이다. 오스트레일리아코알라재단 자료를 보면 2018년 8만마리였던 코알라는 3년 만에 27.5% 감소해 2021년엔 5만8천마리로 줄었다. 기후 위기로 인한 산불, 개발에 따른 서식지 파괴, 질병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2050년엔 멸종돼 볼 수 없을 거라고 경고하는 환경단체도 있다. 3년 전 정부는 특단의 조치로 5천만오스트레일리아달러(약 427억원)를 투입하기로 했지만, 올해도 산불로 서식지가 파괴되자 코알라 700마리가 도살 처분됐다. 코알라가 버티지 못하는 땅은 인간에게도 가혹할 게 자명하다.

‘레이먼드 아일랜드’에서 만난 야생 코알라. 최근 20년간 개체 수가 급감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이다. 박미향 기자
‘레이먼드 아일랜드’에서 만난 야생 코알라. 최근 20년간 개체 수가 급감해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이다. 박미향 기자

섬이 깁슬랜드 대자연 여행의 애피타이저라면,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본식이다. 200년 넘은 유칼립투스 나무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이 공원은 원시 자연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2시(현지시각)께 도착한 타라불가 국립공원. 휙휙, 머리 위로 꼬리가 긴 새가 한바탕 휘젓고 지나갔다. 매표소도, 거대한 간판도, 인공적인 구조물도 없는 공원. 폭신한 흙으로 다져진 좁은 길만이 숲의 안내자로 채비했다.

깁슬랜드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곳이다. 원시 자연을 목도한 듯한 기분이 든다. 거대한 자연을 탐험하게 하는 독특한 여행지다. 박미향 기자
깁슬랜드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곳이다. 공원 여행의 대미는 ‘코리건 현수교’. 빅토리아주관광청 제공

발걸음을 내디딜수록 짙푸른 하늘이 조각조각 났다. 이마저도 곧 사라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굵은 가지로 하늘을 가렸다. 아니, 없애버렸다. 구름마저 쫓아냈다. 파삭, 나무 뒤로 소리가 났다. 호기심에 돌아보니, 야생 동물이 보였다. 이 공원엔 금조, 오리너구리, 웜뱃, 왈라비 등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신비한 야생 동물이 산다. 거대한 양치류 숲에 접어들자 그 웅장함에 위축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곧 기력을 회복했다. 자연은 경쟁 대상이 아니라 우정을 나눌 상대다. 친구의 격려가 생기를 불어넣었다. 공원의 대미는 ‘코리건 현수교’다. 우리네 출렁다리 같은 모양새지만 예상치 못한 숲의 위험을 방지하려는 듯 튼튼한 구조로 지었다. 다리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제아무리 지독한 지옥이라도 나가떨어질 정도로 숲 바닥은 검었다. 도통 그 끝이 가늠되지 않는 어둠이었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팔뚝만 한 고사리 줄기는 이곳을 고생대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깁슬랜드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곳이다. 원시 자연을 목도한 듯한 기분이 든다. 거대한 자연을 탐험하게 하는 독특한 여행지다. 박미향 기자
깁슬랜드 타라불가 국립공원은 울창한 냉온대 우림이 어우러진 곳이다. 원시 자연을 목도한 듯한 기분이 든다. 거대한 자연을 탐험하게 하는 독특한 여행지다. 박미향 기자

이 공원은 정부와 원주민 구나이쿠르나이 부족이 공동 관리하는 구역이다. 1840년 원주민 찰리 타라가 탐험가 파베우 스트셸레츠키와 일행을 이 숲으로 안내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름에 ‘타라’가 들어간 이유다.

이 여행의 디저트는 빅토리아주 작은 해안 마을인 말로 인근에 있는 스노이강 하구를 산책하는 것. 스노이강은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해 빅토리아주 배스해협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울창한 산림과 잘 보존된 청정 해역에선 카약, 트레킹 등 각종 레저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강 하구는 새조차 숨을 고를 정도로 조용해 ‘명상 걷기’ 하기 맞춤하다. 마을 도로에서 하구로 이어지는 길은 흙과 나무 데크로 잘 정돈되어 있다. 이 길을 지나면 3단 케이크 같은 풍경이 나타난다. 나란히 달리는 듯한 모래 해변과 좁은 강, 그 너머에 숲이 마치 공들인 케이크 같다. 하구 산책 안내를 맡은 지역민 개브리엘 무어는 “먹어도 되는 식물이 많이 자란다”며 직접 딴 열매를 권했다. 해협으로 빠져나가는 물줄기는 멈춘 듯 고요했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재촉했다. 너른 바다가 기다린다고 말이다.

빅토리아주 작은 해안 마을인 말로 인근에 있는 스노이강 하구. 이 지역은 \'명상 걷기 여행지\'로 맞춤하다. 박미향 기자
빅토리아주 작은 해안 마을인 말로 인근에 있는 스노이강 하구로 이어진 길. 박미향 기자
빅토리아주 작은 해안 마을인 말로 인근에 있는 스노이강 하구 여행에서 만나는 식물. 박미향 기자

지역의 자연을 담은 맥주

개브리엘 무어는 남편 크리스 무어와 맥주 양조장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85 Marlo Plains RD. Cape Conran East Gippsland)을 운영한다. 하구 산책을 마친 뒤 찾은 그의 농장은 독특한 맥주를 시음하면서 목가적인 풍경을 만끽하는 체험 여행지였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양조장 로고. 개브리엘 무어가 고래 안에 해골이 그려져 있는 양조장 로고에 관해 설명했다. 양조장 이름과도 연관돼 있었다. “고래 안에 있는 해골은 ‘세일러스 그레이브’라고 해요. ‘선원의 무덤’이 고래 안에 있다는 의미죠.”

굴, 각종 해조류, 성게알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로 맥주를 빚는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의 맥주들. 누리집에서 관광 예약을 받는다. 박미향 기자
굴, 각종 해조류, 성게알 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로 맥주를 빚는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의 맥주들. 박미향 기자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의 로고. 누리집 화면 갈무리

이들 부부는 시드니에서 건축가, 컴퓨터 기업 직원으로 일하다가 돌연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지역 풍경을 고스란히 담은 맥주”를 생산하고 싶어서였다. 미국 등에 가 양조 기술을 배웠다. 이들이 만든 생맥주엔 굴, 각종 해조류, 성게알(우니), 오이, 무화과 잎, 망고 등 지역 생산물이 들어간다. 맥주의 재료인 홉도 지역에서 자란 것이다.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맥주는 ‘훈연한 굴이 들어간 맥주’. “짠맛이 느껴지죠. 마치 해변에 있는 것처럼 입술에 소금기가 남아 있는 느낌을 살렸어요.” 그의 말대로 짠맛이 혀 돌기를 파고들었다. ‘짜다’란 맛 성질엔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리기 마련인데, 이들이 만든 맥주는 반대다. 맛있는 짠맛이다. 굴이 들어간 맥주는 두가지라고 했다. “끓여 착즙한 굴을 주스 형태로 만들어 맥주 제조 초기부터 넣어요.” 한국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이라면 ‘노’라고 외칠 법한 ‘오이 생맥주’도 생각이 바뀔 맛이다. 오이 특유의 비린 맛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애그리투어리즘(농업+관광) 생태계 구축에 나선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 풍경. 관광객들이 맥주와 먹거리를 주문하고 있다. 박미향 기자
애그리투어리즘 생태계 구축에 나선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의 먹거리. 박미향 기자

개브리엘 무어는 테루아르(토양)를 강조했다. “지역 생산물을 쓰려고 노력하는 건 낭비되는 땅 때문입니다. 대부분 소를 키우죠. 음식 재료를 생산하는 것보다 쉬워서인데, 요즘은 도시인들이 지역 식재료를 더 찾습니다.” 이들 부부의 철학은 ‘지역과 상생’이다. 크리스 무어가 말했다. “지역 각종 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지역 전체가 성장할 기회를 찾으려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역이 더 다양해지고 더 많은 상품이 생산되면서 소득이 늘어, 모두의 삶의 질이 올라가길 바랄 뿐입니다.”

애그리투어리즘 생태계 구축에 나선 ‘세일러스 그레이브 브루잉’ 풍경. 박미향 기자

이들이 추구하는 관광은 애그리투어리즘이다. “애그리투어리즘 생태계에 우리도 일조하고 있죠. 농업 관광, 숙박 등 새로운 여행을 추구합니다. 폐기물 활용도 보여주려 해요. 교육이자 관광입니다.” 크리스 무어는 관광업이 단순히 버스 타고 와 이것저것을 보는 게 아니라고 했다. “관광객의 지적 수준은 높아지고 있기에 복잡하고 흥미로운 것을 내놓을수록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누리집(sailorsgravebrewing.com)을 통해 여행객 예약을 받는다.

이들처럼 애그리투어리즘을 추구하는 농장은 또 있다. 와인 생산과 레스토랑 운영, 숙박, 웨딩홀 등을 결합한 ‘카라정 에스테이트’(322 Lays Road Willung South 3847)가 대표적이다. 이 와인농장은 깁슬랜드 중부에 자리한 해발 약 520m의 작은 마을 카라정 인근에 있다. 카라정은 원주민 언어로 ‘낚싯줄’을 뜻한다. 아름다운 포도밭 풍경이 이곳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애그리투어리즘 생태계 구축에 힘을 쏟고 있는 ‘카라정 에스테이트’의 와인. 박미향 기자
애그리투어리즘 생태계 구축에 힘을 쏟고 있는 ‘카라정 에스테이트’의 식탁. 지역 유기농 먹거리로 밥상을 차린다. 박미향 기자
‘카라정 에스테이트’를 방문하면 들판을 자유롭게 다니는 알파카 등을 볼 수 있다. 박미향 기자
‘카라정 에스테이트’ 퐁경. 박미향 기자

카라정 에스테이트에서 제일 먼저 여행객을 빨아들이는 광경은 구름이 무스처럼 깔린 포도밭이었다. 맑은 날엔 짙푸른 하늘색과 조화를 이룬 녹색 밭이지만 흐린 날엔 회색빛이 감돌아 채도 낮은 포도밭이 된다. 운치가 있다. 이곳 레스토랑에서 내는 음식은 지역 유기농 작물이 재료다. 당근은 씹을수록 근사한 단맛을, 감자는 혀에 닿을수록 고소한 식감을 제공한다. 찰랑거리는 백포도주가 음식의 품격을 두배로 올린다. 이곳 셰프도 시드니 등에서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자연과 함께하는 삶에 매료돼 카라정에 정착했다. 이곳 여행은 미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숙소 창을 열면 초원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알파카 등이 달려온다. 심신이 지친 이나 마음에 상처가 큰 누구든, 이곳에선 ‘자연 풍경 치유’란 처방전을 받는다. ‘대충 살아도 돼’라고 알파카가, 구름도 뚫을 기세로 뻗은 나무와 숲이, 이것들 사이를 주유하는 바람이 알려준다.

깁슬랜드(오스트레일리아)/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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