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에 한번 받던 아버지 옥중편지는 ‘삶의 버팀목’이었죠

[기억합니다] 40주기 고 이형락 선생 영전에 바치는 노동운동가 딸의 글

고 이형락 선생. 필자 제공

박정희 중정 모진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 사건으로 10년 투옥된 아버지
출소 뒤 고문후유증으로 생 마감
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 받아
자식들에게 욕 한번 하지 않았고
동냥 오는 거지들에게도 친절하셨죠
평생, 평화와 평등 세상을 위한 삶

21일 모란공원에서 40주기 추모제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뉴스에 또다시 사무치는 마음, 1985년 장맛비 속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그립니다. 내리는 빗속에 아버지를 묻으며 너무나도 황망하고, 또 억울해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버지의 40주기 추모제(오는 21일 마석 모란공원)가 이틀 후로 다가왔습니다.

제 아버지는 1931년 7월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유년기를 보내고 해방정국에 청소년기를 거쳐 혁신계 사회운동으로, 자주적 민족 통일을 꿈꾸며 전국적 노동자조직 건설을 위해 노력하던 중 중앙정보부의 모진 고문에 의해 조작된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간첩단 사건의 대구·경북 지역 총책으로 지목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형락입니다. 최종심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어 10년 옥고를 치르고 만기출소 후 고문 후유증 등으로 1985년 6월24일 새벽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감옥에 갇힌 내 마음속 영웅이었고, 내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 밖에서는 간첩 집안, 빨갱이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아도, 의연하게 너희는 자랑스러운 ‘혁명가의 자식’이라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에 기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봉함엽서 한장에 깨알같이 채워오는 아버지의 편지는 세상 제일의 가르침이었고,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혁명이 뭔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가난한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여중 일 년 학교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는 소식에 감옥에서 시를 적어 보내셨던 아버지! 난 역시 아버지 딸이라며 얼마나 뿌듯했던지요. 아버지가 권하는 루쉰의 책은 도서관에서 다 찾아 읽었습니다.

40주기 추모제 포스터.

1978년 가을, 10년 만기출소를 한 아버지가 반가운 것은 잠시, 현실의 아버지는 거처만 집으로 옮겼을 뿐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인 ‘보안관찰대상자’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춘기 반항심에 못된 말도 마구 던지곤 했습니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한 번도 큰소리로 나무람조차 않으셨던 아버지. 평생을 자식들은 물론 주변의 누구에게도 매질도 욕도 한 번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동냥 오는 거지에게도 친절한, 심지어 도둑조차 타일러서 보내셨다던 아버지. 아버지 평생의 삶이 평화를 위한 길이었고, 평등 세상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출소 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약으로도 고칠 수 없던 아버지의 아픔은 모진 고문과 오랜 수형 생활이 남긴 상처라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는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공장에 다니는 딸들과 잡혀갈 때 막 첫돌 지난 막내가 다친 상처 치료를 제때 못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당신은 세상을 더 좋은,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으로 만들어보고자 소신대로 살았고 그 길에 후회는 없었지만, 가족을 보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가시는 그날까지 심장을 조였던 것이라는 걸 아버지 떠나신 후에야 알았습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그 큰 희생을 감내하며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지 그 길을 되짚어 찾아보고 이을 수 있다면 그 길을 잇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사회변혁이라는 화두에 온몸을 던져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삶을 빙산의 한 귀퉁이만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범국민추모제에서 이단아(가운데)씨가 부친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필자 제공

2014년 이형락 선생 재심 무죄 판결 뒤 유족들이 고인 묘소에서 웃는 모습. 가운데가 필자다. 단아씨는 아버지 묘소 참배 때 가족들이 웃기는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필자 제공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과거사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국가폭력에 대한 인식이 넓혀지면서 다시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아버지의 길 그리고 뜻을 잇는 삶과 별개로 우리 가족 안에서도 벗어내지 못한 빨갱이, 간첩이라는 오명으로 매도된 아버지의 삶, 가족에게 무책임했다는 그 잘못된 허물을 벗겨내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을 했습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고, 그리고 재심, 2014년 5월16일 드디어 무죄판결…. 박정희의 정권연장 욕심에 조작된 간첩단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 박근혜 정권에서 국가폭력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밝혀지며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46년 만이었습니다.

우리 가족만의 만족이 아닌, 이 사회에 아버지의 생전 뜻과 활동을 알리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 국가로부터 받아낸 보상금! 아버지의 목숨값으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재단은 아버지와 어머니(고 한기명)의 함자에서 한자씩 따서 ‘형명재단’이라 이름했고, 국가폭력으로 풍비박산되어 제도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형제들의 아픔을 보듬는 마음으로 장학재단으로 설립했습니다.

평생을 평등 세상, 평화 세상을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 도리어 당신은, 당신의 가족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독재자 박정희의 권력욕에 빨갱이로, 간첩의 가족으로 희생되어, 이 사회에서 절대 평등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차별받고 배제된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 국가폭력을 밝혀내고 가족들은 이겨내고 있습니다.

50년 세월을 차별과 멸시 속에서 살았지만, 끝끝내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아버지의 자식임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 감옥에서조차 사랑으로 보듬고 평화를 가르쳐주신 아버지 어머니의 큰 가르침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그립고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단아/형명재단 사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