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경주여행] 1 신라 고분의 비밀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문화유적을 만나게 되는 역사서이자 공원이다. 시가지 중심에 현대인들의 삶의 터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유적 하나하나에 신라 천년의 영광과 비밀이 숨어 있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문화유적이 어우러진 경주의 매력을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찾아오는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개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보물들을 정리해 10회에 걸쳐 기획연재한다.
경주 시가지에 주거지와 나란히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 고분군은 신라 천년의 영혼을 품은 거대한 기억의 창고다. 한때 신라인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여기고, 무덤은 또 다른 세상의 생의 터전으로 조성했다는 것을 수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낱낱이 전하고 있다. 고분마다 특이한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 속에 얽힌 전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다. 고분 사이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고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찾아 천년을 넘어 신라의 숨결과 마주하며 신비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대릉원




-황남대총: 황남동에 위치한 남북 쌍봉의 대형 고분으로, 두 명이 나란히 묻힌 부부합장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황남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라 하여 황남대총으로 부른다. 현존하는 신라 최대의 표형 봉토분이다. 조사에서 남분을 조성한 이후에 북분을 추가로 덧입혀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금관'은 한국 고고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보물이다. 남분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았다. 남분에서만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될 정도로 장신구와 마구류 등이 엄청나게 쏟아져 학계까지 놀라게 했다. 남분에서 무기류와 마구류를 비롯해 철기류가 주로 나온 반면 북분에서 부인대라는 명문이 침각된 은제허리띠가 출토되면서 여성의 무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황남대총은 고분 조성시기와 출토유물 등을 추정해 눌지왕의 릉일 것이라는 학설이 다수설이다.
◆노동리·노서리 고분군



-금관총과 고분정보센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일부 허물어진 집터를 정리하다가 봉분이 파괴되면서 유물층이 노출돼 발굴하게 됐다. 대한민국 고분 중에서 금관이 맨 처음으로 출토되면서 금관총이라고 부른다. 이 금관은 신라 초기 금관 양식의 대표 사례를 보여준다. 출토된 유물 보존처리를 진행하던 중 세고리자루큰칼의 칼집 하단 장식에 '이사지왕'이라 새겨진 글을 발견했다. 이후 2015년 금관총을 재발굴 조사하면서 다시 금제칼집장식에서 '이사지왕도'라는 글씨를 확인하고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봉황대: 대릉원 남서쪽에 위치한 대형 봉분으로 단독분으로는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직경이 82m, 높이 22m에 이른다.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면서 봉분 능선에 고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이채로운 분위기로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발전하고 있는 뮤직스퀘어 무대가 되고 있다. 봉황대는 경주 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는 도로의 동쪽에 위치해 노동동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이 되고 있다.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황남대총과 더불어 왕족의 묘로 추정된다. 고분의 형태와 위치만으로도 그 상징성을 가늠할 수 있다.
-금령총: 금령총은 1924년 우메하라 등에 의해 발굴됐다. 발굴하기 이전에 이미 봉분이 많이 훼손돼 있었다. 지금도 발굴 이후에 봉분을 복원하지 않아 높이 약 2m 정도로 흙더미를 쌓아둔 정도의 형태로 남아있다. 금관과 함께 금허리띠, 금제팔찌, 반지, 금제귀걸이, 목걸이 등의 각종 장신구와 고리자루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으로 만든 방울, 즉 '금령'이 발견된 고분이어서 금령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금관과 신발까지의 짧은 길이와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어린 여자아이의 무덤으로 보고, 무덤의 주인을 공주 또는 왕족의 여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기미인물상 토기 2점은 특이한 유적으로 학계에 관심을 끌었다.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복식과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 등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식리총: 식리총도 금령총과 바로 이웃해 있으면서 같이 1924년에 발굴됐다. 금령총과 마찬가지로 봉분은 높이 3m 정도로 완전히 복원하지 않았다. 금제 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 은제 과대와 요채, 은팔찌 등의 장신구와 철제 큰 고리칼 등의 유물과 함께 금동으로 만든 신발이 출토되면서 식리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라 후기의 귀족 무덤으로, 벽화와 목곽이 있는 독특한 구조가 특징적이어서 출토된 유물보다 고분 내부 구조의 보존 가치가 높아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글의 내용은 관광안내를 위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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