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경주여행] 1 신라 고분의 비밀

강시일 기자 2025. 6. 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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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풍기는 신라 왕족의 고분으로 공원을 이루는 대릉원
대릉원 정문.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문화유적을 만나게 되는 역사서이자 공원이다. 시가지 중심에 현대인들의 삶의 터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유적 하나하나에 신라 천년의 영광과 비밀이 숨어 있다. 이러한 자연과 역사문화유적이 어우러진 경주의 매력을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찾아오는 국내외 방문객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소개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면서 보고 느낀 보물들을 정리해 10회에 걸쳐 기획연재한다.

경주 시가지에 주거지와 나란히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 고분군은 신라 천년의 영혼을 품은 거대한 기억의 창고다. 한때 신라인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여기고, 무덤은 또 다른 세상의 생의 터전으로 조성했다는 것을 수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낱낱이 전하고 있다. 고분마다 특이한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 속에 얽힌 전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다. 고분 사이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고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찾아 천년을 넘어 신라의 숨결과 마주하며 신비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대릉원

신라 왕궁 월성의 서편에 위치한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밀집된 경주 고분군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명소이다. 거대한 봉토와 정비된 조경 속에서 고대 왕국의 신비감이 느껴진다. 내부가 공개되고 있는 천마총과 연못에 데칼코마니로 신비경을 연출하는 황남대총, 미추왕릉, 검총 등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고분군이다. 30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던 곳이 무작위 발굴로 많이 훼손되었지만 20여기의 봉분들이 여전히 신라 고분의 신비를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대릉원 내부에 다시 돌담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는 미추왕릉.
-미추왕릉: 신라 제13대 왕 미추이사금의 무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왕'이라는 전설과 함께 능 앞에는 미추왕을 기리는 숭혜전이 있다. 석씨 왕가의 사위 신분으로 김씨로는 최초로 왕위에 오른 전설적인 인물로 김알지의 7세손으로 전한다. 사후에 릉을 조성하고 대릉이라 칭했다. 이 때문에 대릉원이라 부른다는 설명도 있다. 삼국유사 등에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 은혜로운 성군으로 여러 가지 신화가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라 죽현릉, 죽장릉이라고도 부른다. 유례왕 14년인 297년 이서국 군사들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해 함락 직전이었는데 귀에 대나무를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사라졌다. 나중에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군사들의 귀에 꽂았던 대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미추왕이 도왔다고 믿었다.
신라시대 철검이 출토된 검총.
-검총:일제강점기였던 1916년 발굴 당시 철검이 출토되었다고 해서 검총으로 명명하고 있다. 냇돌을 두텁게 깔고 그 위에 피장자를 안치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지만 일반적인 대릉원 주변의 고분과 성격이 다르다. 다른 대형분에서 금관과 금제허리띠, 금귀걸이 등의 화려한 유물들이 대량으로 매장된 것과는 다르게 출토유물이 철검 위주로 간단하고 빈약하다.
155호 고분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된 천마도.
-천마총: 천마총은 박정희 대통령이 신라 고분을 문화관광자원화하기 위해 발굴을 시도한 결과, 찬란한 신라 문화의 보고로 드러난 황금신라의 결정체다. 1973년 대한민국 자체 기술로 처음 발굴 조사가 이뤄진 신라 고분인데 금관과 말다래, 금허리띠, 금모자 등 1만1천5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내부에서 말 그림이 그려진 '천마도'가 발견돼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으로 기록되고 있는 황남대총.

-황남대총: 황남동에 위치한 남북 쌍봉의 대형 고분으로, 두 명이 나란히 묻힌 부부합장무덤으로 전하고 있다. 황남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이라 하여 황남대총으로 부른다. 현존하는 신라 최대의 표형 봉토분이다. 조사에서 남분을 조성한 이후에 북분을 추가로 덧입혀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서 출토된 '황남대총 금관'은 한국 고고학의 정점을 보여주는 보물이다. 남분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았다. 남분에서만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될 정도로 장신구와 마구류 등이 엄청나게 쏟아져 학계까지 놀라게 했다. 남분에서 무기류와 마구류를 비롯해 철기류가 주로 나온 반면 북분에서 부인대라는 명문이 침각된 은제허리띠가 출토되면서 여성의 무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황남대총은 고분 조성시기와 출토유물 등을 추정해 눌지왕의 릉일 것이라는 학설이 다수설이다.

◆노동리·노서리 고분군

여기에서 대릉원 북쪽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길의 동서로 구분해 노동리와 노서리 고분군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노서리고분군부터 호우총, 쌍상총, 마총, 서봉황대, 서봉총을 지나 금관총과 고분정보센터를 보고 노동리고분군의 금령총, 식리총, 봉황대 그리고 신라대종을 보면 일차 고분의 비밀은 대충 이해하게 된다.
신라의 땅에 묻혀 관심을 끌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호우.
-호우총: 은령총과 함께 1946년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반에 의해 발굴된 고분이다. 발굴 당시 이미 고분이 훼손돼 봉분의 형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금령총처럼 높이 4m 정도로 복원한 상태다. 발굴에서 금동관, 금으로 만든 관드리개, 금귀걸이, 유리구슬, 목걸이, 금팔찌와 반지, 은제반지, 은으로 만든 허리띠와 장신구, 그리고 금동장단룡 환두대도가 피장자가 착용한 상태로 출토됐다. 특이하게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호우가 출토되면서 고분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부른다. 호우명 그릇은 장수왕 3년에 제조된 기념품으로 보아 고구려와의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나무로 만든 가면, 단룡환두대도, 가죽으로 만든 화살통 등의 유물과 호우 기념물을 유추하면 피장자는 고구려인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하게 한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면서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과 데이비드총이 평평하게 봉분의 모습을 잃고 있다.
-서봉총: 1926년 고이즈미 등의 일본인들이 중심이 돼 발굴했다. 봉황 형태로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일본을 여행하던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를 불러 직접 금관을 들어올리는 퍼포먼스를 펼친 곳이다. 고분은 봉황형 장식의 금관 '봉'자와 스웨덴 황태자가 참여한 발굴을 기념한 스웨덴의 한자 표기 '서전'에서 '서'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이름지었다.
금관총과 고분정보센터 영상물로 소개되는 금관총의 내부 구조.

-금관총과 고분정보센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일부 허물어진 집터를 정리하다가 봉분이 파괴되면서 유물층이 노출돼 발굴하게 됐다. 대한민국 고분 중에서 금관이 맨 처음으로 출토되면서 금관총이라고 부른다. 이 금관은 신라 초기 금관 양식의 대표 사례를 보여준다. 출토된 유물 보존처리를 진행하던 중 세고리자루큰칼의 칼집 하단 장식에 '이사지왕'이라 새겨진 글을 발견했다. 이후 2015년 금관총을 재발굴 조사하면서 다시 금제칼집장식에서 '이사지왕도'라는 글씨를 확인하고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최근 금관총 축조 경위를 보여주는 무덤내부를 복원해 공개하면서 신라 고분 축조 경위 등의 정보를 설명하는 고분정보센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단일 봉분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 뮤직스퀘어 등 경주 문화행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

-봉황대: 대릉원 남서쪽에 위치한 대형 봉분으로 단독분으로는 한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직경이 82m, 높이 22m에 이른다.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면서 봉분 능선에 고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이채로운 분위기로 경주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발전하고 있는 뮤직스퀘어 무대가 되고 있다. 봉황대는 경주 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는 도로의 동쪽에 위치해 노동동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이 되고 있다.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황남대총과 더불어 왕족의 묘로 추정된다. 고분의 형태와 위치만으로도 그 상징성을 가늠할 수 있다.

-금령총: 금령총은 1924년 우메하라 등에 의해 발굴됐다. 발굴하기 이전에 이미 봉분이 많이 훼손돼 있었다. 지금도 발굴 이후에 봉분을 복원하지 않아 높이 약 2m 정도로 흙더미를 쌓아둔 정도의 형태로 남아있다. 금관과 함께 금허리띠, 금제팔찌, 반지, 금제귀걸이, 목걸이 등의 각종 장신구와 고리자루칼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으로 만든 방울, 즉 '금령'이 발견된 고분이어서 금령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금관과 신발까지의 짧은 길이와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어린 여자아이의 무덤으로 보고, 무덤의 주인을 공주 또는 왕족의 여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함께 국보로 지정된 기미인물상 토기 2점은 특이한 유적으로 학계에 관심을 끌었다.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복식과 무기, 말갖춤 상태, 공예의장 등에 대한 연구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식리총: 식리총도 금령총과 바로 이웃해 있으면서 같이 1924년에 발굴됐다. 금령총과 마찬가지로 봉분은 높이 3m 정도로 완전히 복원하지 않았다. 금제 귀걸이와 유리구슬 목걸이, 은제 과대와 요채, 은팔찌 등의 장신구와 철제 큰 고리칼 등의 유물과 함께 금동으로 만든 신발이 출토되면서 식리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라 후기의 귀족 무덤으로, 벽화와 목곽이 있는 독특한 구조가 특징적이어서 출토된 유물보다 고분 내부 구조의 보존 가치가 높아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글의 내용은 관광안내를 위해 스토리텔링을 가미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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