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의 세계로 담아낸 ‘약물 중독’…“한 걸음 떨어져 보편적 연대 고민” [인터뷰]

고승희 2025. 6. 19.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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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로 담아낸 세계 다원극 ‘컨선드 아더스’
서울 이어 26일부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
약물 중독 실제 증언을 인형극으로 보여줘
스코틀랜드 극단 ‘토르토이즈 인 어 넛쉘의 ‘컨선드 아더스’ [서울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초승달 모양의 테이블 앞에 앉은 한 사람. 그는 하얀 종이 위에 검은 펜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의 사람을 그린다. 종이 한 장에 한 사람씩. 차곡차곡 쌓여 그림이 완성되자, 어딘가로 하염없이 달려가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연출자 알렉스 버드. 그의 머리 위 빔프로젝터에선 헤로인이라는 글자와 알록달록한 색의 알약이 쏟아지고, 약물 중독 실태를 다룬 온갖 뉴스가 뒤엉킨다.

턴테이블 위에 설치된 신발 상자 크기의 설치물. 그 안에 자리한 화장실, 집 안의 거실, 상담실과 32㎜의 피규어…. 마이크로 프로젝션이 텅 빈 화장실로 향하자, 여자의 목소리가 어떤 날을 회고한다.

“그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어요. 만약 그런 곳이 있었다면 제 친구가 화장실에서 죽은 뒤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되진 않았을 거예요.”

2021년 기준 한 해 동안 마약 관련 사망자의 숫자는 1330명. 2020년 최고치에 비해 소폭 감소했지만, 2000년 사망자 숫자와 비교하면 4.6배에 달한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약물 관련 사망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약물 중독을 소재로 한 다원 예술 ‘컨선드 아더스(Concerned Others)’의 알렉스 버드 연출가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사회적 봉쇄 속에서 중독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접하게 됐다”며 “지원 체계와 공동체로부터 단절된 채 고립된 이들의 상황을 보며, 처음으로 중독이 개인과 주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고민해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컨선드 아더스’는 스코틀랜드 극단 ‘토르토이즈 인 어 넛쉘(Tortoise in a Nutshell)’의 작품으로, 2023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선정작이다. 서울문화재단의 ‘2025 쿼드 초이스’의 일환으로 최근 공연(6월 12~15일)을 마쳤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6월 26~29일)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극단이 무대를 구현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영상과 조명, 오브젝트 등의 여러 요소를 인형극적 무대에 버무려 만들어낸다. 작은 무대는 경이롭고 아름답다.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사회성 짙은 소재와 이야기는 정교한 미니어처 무대를 거치며 무게를 덜어내고, 왜곡과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스코틀랜드 극단 ‘토르토이즈 인 어 넛쉘의 ‘컨선드 아더스’ [서울문화재단 제공]

“미니어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체라 매력적으로 느꼈어요.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세계를 통해 관객이 이야기 속 인물의 시선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정보 전달보다는 관객 스스로 사고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고, 복합적인 주제를 감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감각적 형식을 선택했어요.”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알렉스 버드 연출가와 극단은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약물 중독자, 중독자들의 지인과 가족, 그들을 치료하는 전문의까지 약 60명의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탐사보도처럼 깊이 취재하되, 따뜻한 시선을 더했다.

알렉스 버드는 “회복 현장에서 일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중독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시선을 조명할 수 있는 공공 공연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지점에서 이번 작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렌즈가 투영한 미니어처 세계는 아주 작지만, 현실만큼 거대하고 나약하다. 무대는 극단이 상주하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실제 건물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축제의 도시’에서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에겐 공간의 실재성이 더 크게 다가올 지점이다. 버드는 “지역 공동체와의 연결을 중요하게 여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일상의 공간’을 무대에 옮기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작은 구조물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도시와 사람들의 삶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고 귀띔했다.

작품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약물 중독을 넘어 알코올, 카페인 중독까지 다양한 사례로 확장했고 중독에 관계된 사람들의 음성을 삽입해 그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극단이 바라보는 중독에 대한 시선은 그간 미디어가 담아낸 모습과는 다르다. 무대는 막을 올린 뒤 ‘중독을 바라보는 도덕적 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쁜 사람의 나쁜 선택, 나약한 이들의 선택”이라고 세상은 규정하나, 사실은 “우리 모두 취약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무대는 “8살에 헤로인을 강제로 투약 당해 마약 운반책으로 키워진 피해자”, “끔찍한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을 시작한 여자”처럼 누군가에겐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사례를 들려준다.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있지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선택했고,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하게 달려나가는 사람들의 삶, 그들을 곁에서 돌봐주고 지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외면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다.

스코틀랜드 극단 ‘토르토이즈 인 어 넛쉘의 ‘컨선드 아더스’ [서울문화재단 제공]

약물 중독은 죄악시하면서 알코올에 대해선 ‘권장하는 사회’의 모습도 담아낸다. 오래된 버드와이저 광고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렇다. 버드는 “작업 초기 60명의 관계자와 대화를 나눌 때 약물뿐 아니라 다양한 중독 문제를 함께 이야기했다”며 “특히 알코올 중독은 사회적으로 정상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그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중독을 비난하기보다, 그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중독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으며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이 있다. 버드는 “우리는 세상을 반영하되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신하거나 우리의 생각을 그들의 목소리처럼 표현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말했다.

“약물 중독은 공개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주제이나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이 안전한 거리감 속에서 중독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도록 했어요.”

여러 개의 신발 상자 크기의 무대가 담은 초소형 세계가 등장하는 작품 후반부는 각별히 심혈을 기울인 장면이다. 여기에서 중독자 지인들의 깊은 이야기가 쏟아진다. 버드는 “가장 감정적으로 복잡한 증언들이 담긴 장면”이라며 “단순함과 정교함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디테일을 통해 진정성을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더 이상 ‘약물 청정국’ 수사를 잃은 한국에서도 시사점이 크다. ‘연대의 삶’, ‘공존의 삶’을 향한 창작자들의 시선은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우리의 지금을 돌아보게 한다. 중독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독자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이들의 오늘은 ‘컨선드 아더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린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을 예술로 탐구하고 있어요. 이 작품은 비록 스코틀랜드의 이야기로 시작됐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보편적이에요. 중독과 관련된 낙인과 지원의 부재는 어디에서나 존재하니까요. 이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연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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