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랜드마크 지하에 벽처럼 도열한 조선민화 명품들

노형석 기자 2025. 6. 1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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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미술관 기획전 ‘조선민화’
호랑이와 물고기들이 꽃 피는 산속 계곡을 배경으로 함께 등장하는 ‘어락도’ 2폭 병풍의 일부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노형석 기자

요즘 서울 용산벌 랜드마크로 꼽히는 아모레퍼시픽빌딩 지하 공간엔 온갖 ‘욕망의 그림들’이 거대한 벽체를 이루며 도열해 있다. 이빨 드러낸 호랑이 무리가 눈을 번들거리는 큰 물고기 떼와 꽃 피는 산골 계곡에서 같이 어우러져 노닐고, 금강산의 기암괴봉은 주름 덩어리로, 연못은 물주머니로 변모하며, 신선은 거대한 새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가 하면, 옛적 선비들이 애용하던 책장 위엔 영문이 인쇄된 양담배가 버젓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런 황당무계한 그림들이 병풍을 이루면서 줄줄이 펼쳐진다.

지난 3월부터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조선민화’의 풍경은 19세기와 지난 세기 선조들의 마음을 휘감았던 변화무쌍한 욕망 이미지의 난장이다. 공사립 미술관에서 나온 유명 작품들은 물론, 재력가들 집 안에 깊숙이 간직돼 있던 길상그림과 장식화 등 민화류 100여점이 내걸렸다. 민화는 흔히 17~19세기 조선의 무명 화가들이 다채로운 개성을 담아 그린 그림들을 일컫는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시는 18세기 후반∼20세기 초 책가도, 문자도, 백선도, 호접도, 어해도, 호작도, 수렵도 등으로 불리며 다양한 소재, 주제, 기법을 부려놓았던 세부 장르의 면모를 한자리에 모았다.

영문 글자가 인쇄된 양담뱃갑이 그려진 ‘책거리’ 12폭 병풍의 일부분. 노형석 기자
‘제주문자도’ 8폭 병풍 일부분. 노형석 기자

전시의 막을 여는 책가도 영역에서는 영문 글자가 인쇄된 양담배갑이 그려진 ‘책거리’ 12폭 병풍이 단연 눈길을 끈다. 무오년인 1918년 전북 부안군에서 그렸다는 기록과 ‘완산학사’라는 인장까지 찍혀 있어 책가도 그림 가운데 그린 시점과 장소를 알 수 있는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근대 시계와 영문 담뱃갑 등 신문물을 전통 민화 도상에 끌어들인 상상력이 색다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자도 영역에서는 ‘제주문자도’ 8폭 병풍이 압권이다. 화면을 세 부분으로 구성해 한가운데는 푸른빛의 한자 글자를 올리고, 위와 아래에는 제주도에 서식하는 나무와 새, 꽃, 물고기, 집 등의 단순한 이미지를 그렸는데,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섬의 시각적인 인상이 직감적으로 와닿는 수작이다.

전시 후반부에 나오는 ‘고사인물도’ 6폭 병풍(개인 소장)의 일부분. 노형석 기자

민화의 단골 소재인 물고기와 주변 배경을 그린 그림들은 자연 경물의 물리적 제약을 벗어던진 기발한 구도가 쾌감을 자아낸다. 험상궂은 척하는 익살 호랑이와 맹한 듯 눈치 보는 물고기들이 꽃 피는 산속 계곡에서 함께 어울리는 ‘어락도’ 2폭 병풍은 민화가 자연의 경물과 생명체를 빌려 복을 빌고 삶의 활력을 기원하는 그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이 행복한 삶의 욕망은 추상적이면서도 고졸한 맛이 물씬한 민화풍 산수화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20세기에 그린 ‘관동팔경도’ 8폭 병풍을 보면 구불구불한 바다의 물결 표현을 지루할 만큼 되풀이하면서 이런 물결이 다른 기암이나 사람의 풍경과 만났을 때 대비되는 추상적인 미감이 강렬하다. 19세기 후반 무명 화가가 그린 전시 후반부의 ‘고사인물도’ 6폭 병풍도 이런 자유로운 조형 정신을 또 다른 경지로 보여주는데, 헐렁한 듯하면서도 개성적인 선으로 삼국지연의도와 신선도의 인물과 배경을 해석해 그렸다.

20세기에 그린 ‘관동팔경도’ 8폭 병풍의 일부분. 노형석 기자

20세기 만든 백선도 8폭 병풍은 8폭 화면에 산수, 꽃과 새, 새군자 등 다채로운 소재를 그린 부채 그림들이 겹겹이 배치된 것이 특징. 백납도 병풍과 마찬가지로 다기한 주제와 소재의 그림들을 한꺼번에 보고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시절 잘살던 유한층 특유의 문화적 취향을 엿보게 한다.

민화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그림이다. 출품작들에서 전반적으로 도드라지는 건 욕망의 표현력이다. 뭍과 바다, 자연과 사회 등으로 분절된 세상의 시각적 질서를 단박에 뛰어넘으며 다른 생물체와 기물들을 마구 뒤섞고 어울리게 해 시각적 감흥을 일으킨다.

20세기에 만든 백선도 8폭 병풍의 일부분(서울대박물관 소장). 노형석 기자

큰 병풍 형식의 대형 민화들을 주로 내놓아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됐다는 평이 나온다. 진귀하고 의미 있는 작품들이 많아 애호가들은 시간 들여 볼 만한 전시지만, 모란화조화, 연화도, 나비를 담은 호접도 등은 정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정격 그림들이다. 궁중과 양반가에서 선호하던 이런 고급 그림들도 상당수 민화의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어, 과연 민화의 개념과 범주가 어떤 것인지 혼란이 생기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지난 10여년간 궁중장식화와 전통채색화와 골계, 해학을 기조로 한 서민민화의 미술사적 구분과 장르 개념의 재해석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러 치열한 논의가 펼쳐진 바 있는데, 이 전시는 이런 학계 저간의 움직임과 인식의 전환 등도 거의 반영하지 않은 채 소재별·주제별 명품 보여주기의 고답적인 틀거지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전시를 새롭게 차려야 할 목적과 명분이 모호하다는 말이다. 구성이나 문제의식보다는 다분히 보기 드문 명품들을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 찾아 보여준다는 과시의 맥락이 더 도드라지는 전시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29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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