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수능 미적분·기하 선택하면 '이과생'이라는 억지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2025. 6. 1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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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 시행일인 4일 오전 부산 사상구 주례여고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고등학교의 '이과생'이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 학과를 넘보는 소위 '문과 침공'이 해를 거듭할수록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올해는 서울·수도권에서 서울대·고려대를 제외한 17개 사립대의 340개 인문계열 학과 정시모집 합격생 중 절반을 훌쩍 넘는 55.6%가 수능에서 '미적분·기하'를 선택한 '이과생'이었다는 것이다. 대학교육협의회가 2004년부터 운영하는 대입정보 포털 '어디가'(www.adiga.kr)의 공시 자료를 분석한 사교육 업체의 임의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다.

소위 문과 침공의 상황은 대학·학과마다 천차만별이다. 실제로 이과생의 비율은 한양대(87%)가 가장 높았고 서강대(86.6%)·건국대(71.9%)·서울시립대(66.9%)·성균관대(61.0%)가 뒤를 이었다. 합격생 전원이 이과생이었던 학과도 21곳이나 됐다. 심지어 이화여대 의예과·뇌인지과학부가 문과생을 뽑겠다고 내놓은 인문전형의 합격생도 전원 이과생이었다.

● 미적분·기하를 선택하면 '이과생'?

대학이 공개한 통계자료를 분석한 사교육 업체가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 학과를 침공하는 주범을 지목한 '이과생'의 정체가 묘하다. 사실 수험생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문·이과 구분'은 제도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상황이다.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으로 알려진 '2015년 개정 교육과정'은 물론 2022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수능'에서도 '문·이과'의 구분이 없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확실하게 굳어진 '문·이과 구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교육과정이나 수능 체계와 상관없이 학교 현장에서는 관행적으로 학생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하고 있다.

국어·수학·사회·과학 교과군의 선택과목이 구분의 기준이다. 흔히 문과 학생은 국어에서 '화법과작문', 수학에서 '확률과통계', 그리고 과학에서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I'을 선택하고 이과 학생은 '언어와매체'·'미적분/기하'·'과학 II'를 선택한다. '사회' 교과군에도 9개의 일반선택 과목이 있다.

그런데 '어디가'에 공시하는 통계 자료에서는 개별 합격생의 선택과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합격생 자료를 분석한 사교육 업체는 궁여지책으로 '수학' 교과군의 선택과목을 근거로 '문과생'과 '이과생'을 구분했다. 수학에서 '통계와확률'을 선택한 합격생을 '문과생'으로 구분하고 '미적분'이나 '기하'를 선택한 합격생을 '이과생'으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언론에 요란하게 소개되는 '문과 침공'은 실제로 대학의 인문·사회 계열 정시모집 합격생 중 55.6%가 수학에서 '미적분' 또는 '기하'를 선택했다는 뜻일 뿐이다. 과연 '미적분·기하'를 선택한 학생이 모두 '언어와매체'와 '과학 심화과목(II)'을 선택한 '진짜 이과생'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교육 업체가 자의적·임의적으로 지목한 문과 침공의 주역이 사실은 '화법과작문'과 '과학 초급과목(I)'과 함께 표준변환점수에서 유리한 '미적분/기하'를 선택한 '진짜 문과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수능의 표준변환점수에서 유리한 '미적분/기하'를 가르치는 학원가의 수학 전문반을 찾는 상위권 문과생이 적지 않다.

수험생에게 '미적분'과 '기하'의 높은 표준변환점수의 유혹은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원점수가 똑같더라도 상위권 학생의 경우에는 난이도가 높을수록 표준변환점수가 더 많이 올라가는 어처구니없는 구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4년 동안 '미적분·기하'의 표준변환점수 최고점이 '확률과통계'보다 3점에서 11점이 높았다. 2025학년도의 수능에서도 무려 5점이 높았다고 한다.     

  
● 교육부가 부추긴 엉터리 '문과 침공'

'문과 침공'은 '문·이과 통합'을 거부하는 사교육 시장과 언론이 만들어낸 거칠고 선정적인 표현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침공'(侵攻)은 '다른 나라를 침범하여 공격한다'는 끔찍한 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고 있다.

정시를 치르는 이과생을 남의 떡을 넘보는 침략군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언어 파괴가 심각한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선정적·파괴적인 '이과 침공'은 지나치게 반(反)교육적인 억지다.

더욱이 이과생이 문과 학과를 넘볼 이유도 분명치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MZ 세대에게 인문·사회 게열의 학과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문과에 진학하는 학생에게는 졸업 후의 진로가 절망적이다.

오늘날의 기업은 수도권 대학의 문과 졸업생보다 지방대학의 이과 졸업생을 더 좋아한다. '이공계 기피'로 몸살을 앓았던 IMF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상이다. 문과 침공은 오로지 '학벌'에만 매달리는 기성세대의 낡은 인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2023년 1월 6일의 발언이 그런 '문과 침공'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초중고 모두 이과를 준비한 학생이 수능을 치른 뒤 학교 간판을 따겠다고 인문대학으로 진학해 간판만 걸어놓고 휴학해 반수한다.”는 이주호 장관의 발언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것이었다.

교육부의 정책 실패를 고등학생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고 우긴 것이다. 불합리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어린 학생들을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매도해 버렸다. 더욱이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과 '통합형 수능'을 운영하는 교육부 장관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당시 이주호 장관이 밝혔던 대책도 엉터리였다. 선택과목인 '확률과통계·미적분·기하'의 “난이도를 적절하게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대교협과 협의해서 대학 자체의 입시 전형에서 문과 학생들이 불리한 부분을 조정하겠다”는 발언도 억지였다.

이과 계열에서 학과의 특성에 따른 선택과목 요구가 '문과생에게 불리한 전형 요소'라는 주장은 입시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억지였다.

더욱이 인문·사회 계열의 학과에 미적분이나 기하를 선택한 학생이 많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도 없다. 미적분과 기하에서 얻은 소양이 인문·사회 계열의 공부에 장애 요인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미시경제학과 심리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적분이 필수 소양이다.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던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미적분을 몰라서 겪었던 뼈아픈 경험담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이과의 '통합'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되어 '2022년 개정 교육과정'으로 구체화 된 문·이과 통합은 고등학교 교육을 1년으로 축소하겠다는 황당한 시도일 뿐이다.

실제로 2028년부터 시행되는 진짜 '문·이과 통합형 수능'은 고등학교 1학년의 '통합' 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에서 배워야 하는 미적분·기하·통계와확률은 물론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의 심화과목(II)도 모두 수능에서 배제된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는 공교육 현장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통합과목' 수준의 엉터리 문·이과 '통합'이 아니다. 오히려 적성과 진로를 핑계로 학생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엉터리 '낙인'을 찍어주고 있는 낡은 '문·이과의 '구분 폐지'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 학생을 문과와 이과로 구분해서 가르치는 문·이과 구분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과 과목과 이과 과목을 합칠 수도 없고 문과생을 이과생과 합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말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과 교육과 이과 교육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다. 문과와 이과의 '벽 허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미래 세대에게 문과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음양오행설을 자연의 운행 법칙이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학생에게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현대 과학기술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과학지식과 21세기의 인문·시대정신이 되어야 할 '과학정신'을 가르쳐야만 한다. 이제 고등학생에게 '문과생'과 '이과생'이라는 낙인은 아무 의미가 없게 돼버린 세상이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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