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깜빡이 켜고 저문 길을 나선다
모처럼 진실이라던 실선實線 다 무너지고
소수점이하 언어들이 가지 끝에 눈물 맺힐 때
우리는 깜빡이 켜고
저문 길을
나선다
시대의 바른 대답을 안개 속에서 찾을 거라며
축축한 손길 위로 촛불 받아든 달맞이 꽃
무작정 끌고 온 길이
평지에서
더디다
허락하지 않은 길에도 샛길 하나를 숨겨둔다는
고독한 산보자의 그 우울한 윤곽 밖으로
초록빛 화살표 하나가
걱정스레
찍힌다.
/1997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연간 강수량이 국내에서 제일 많다는 제주도에는, 봄과 여름 사이에 장마철이 끼면서 사계절이 아닌 오 계절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필 그 무렵에 시작된 나의 문학인생의 삶은 안개지대처럼 자욱했습니다. 모처럼 진실이라 여겼던 갖가지 시대상이 안개 속에서 하나 둘 허물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임시작업실이었던 한림읍 중산간 마을에서 차를 몰고 현재 '평화로'라 이름 바뀐 서부산업도로에 들어섰습니다. 그 길이야 말로 장마철 안개로 유명했습니다. 저물 무렵에 그 길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지독한 안개가 끼어 있었습니다.
짙은 안개 속을 주행하는 것도 또 다른 시의 세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길 양옆으로 다가오는 오름이나 초목들이 마치 사람의 형상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맞은편에서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차량들 비상등이 시대의 바른 대답을 기다리는 달맞이꽃처럼 보였습니다.
제주시가 가까워진 광령 삼거리 신호등이 빨간 신호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신호등 지시에 따라 차를 멈추고, 그날 안개 속에 무너져 실선 밖으로 다가왔던 갖가지 형상들을 한참동안 떠올렸습니다. 그러자 뒤에 멈춰 섰던 대형트럭의 굉음 같은 경적소리에 놀랐습니다. "앗차!"하고 출발하려는데, 신호등 초록 화살표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